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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Nov 08. 2021

7.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내려가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 환하게 빛난다.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어둠으로 들어가는 용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빛나게 한다. 우리가 아래로 내려갈 때 기억해야 할 단 가지는 어둠은 결코 우리를 삼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작은 공장이 부도가 났다.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얼룩진 기억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빚쟁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부모님은 “한겨울에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라는 거냐!! 이대로 나가면 다 얼어 죽는다!!”라며 사정도 하고, 화도 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이 모두 얼어 죽는 꿈을 꾸었다.

하필 나만 빼고…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여인숙과, 귀뚜라미가 살고 있는 남의 집 지하실에서 백열전구 하나 켠 채 며칠을 보내다가, 합판으로 누울 자리만 간신히 만든 빈 상가, 등을 전전긍긍했다. 당시 부모님이 정확하게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용역 일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한동안 모란시장에서 쥐포와 번데기를 팔았었다. 그런 탓에 우리 4남매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 없이 우리끼리 밥을 차려 먹고, 우리끼리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침에 엄마가 밥을 해 두고 나가면, 간식거리 하나 없이 먹을 것이라곤 밥이 전부였다. 가끔은 한꺼번에 그것마저 다 먹어버렸다. 밖으로 나와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누군가 먹다가 흘린 비스킷을 주워 나눠 먹었다. 어느 날, 과자를 주워 동생과 나눠 먹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달려와 우리를 에워쌌다.   

  


“땅거지래요~~ 땅거지래요~~”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빠져나오느라 진땀을 뺐다. 한번은 저녁이 한참 지났는데도 부모님이 오지 않았다. 배고픔에 울고 있는 동생들 때문에 언니와 함께 밥을 지으려고 열심히 쌀을 씻었다. 그런데 정작 성냥불을 켜지 못해 석유곤로에 불도 못 붙이고 끝나버렸다. 엄마가 오기 전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늦잠을 자고 있었다. 엄마가 아침 일찍 흔들어 깨웠다. 입학식이라고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어리둥절하여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평상시에 입고 다니던 옷을 입고, 언제 샀는지 모르는 책가방을 멨다.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어가는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 학교에 갔다. 유치원에도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언니와 동생들하고만 지내다가 그렇게 많은 또래 친구들은 난생처음이었다. 처음 본 낯선 광경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교실을 배정받고, 자리에 앉았을 때 이곳저곳에서 웅성웅성 아웅다웅하는 반 아이들의 소리가 공포에 가깝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서로 다녔던 유치원 얘기도 하고, 통성명도 하고 깔깔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빛이 나에게 꽂힐 때면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윽고 앞에 앉은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일제히 주변 아이들이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질문 공세를 받다가 입도 뻥끗 못 한 덕분에 입학 첫날부터 ‘벙어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음 날도 늦잠을 자고 있는데 엄마가 더 시끄럽게 깨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또다시 학교에 가야 하고, 앞으로 매일매일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학교를 매일매일 가야 한다니…’ 너무 막막하고 두려웠다.      


‘차라리 동생들과 놀이터에서 누군가 먹다 버린 비스킷을 주워 다가 영웅이 되는 편이 낫지’    

 

어린 나에게 삶은 이미 전쟁터 같았다. 학교는 정말 지옥이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집에 갈 일만 생각했다. 교실에 도착하면 물 한 모금,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4교시 내내 자리에만 앉아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어슬렁거리며 교문을 나와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나에게 가장 편한 곳은 그럴싸한 학교보다, 동생들과 보내는 컴컴한 지하실 안이었다.



가난이 아프지는 않았다. 가난이나 먹고 싶은 음식 따위를 못 먹는 것이 특별히 불행하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주어진 삶에 그저 수긍하며 살아가던 어린아이였다. 3녀 1남 중 둘째, 막내가 아들인 우리 집은 아들을 꼭 낳고 싶었던 엄마가 ‘어쩔 수 없이 낳은 둘째와 셋째’라는 것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것조차 학교에 가야 하는 현실보단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 입학한 후로 거대한 세상에서 움츠린 채 살아내야 하는 불행하고 불쌍한 아이가 되었다. 유일하게 집에 있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언니가 가지고 가면, 번번이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께 혼이 났다. 반 아이들은 놀려댔다.





엄마에게 준비물을 사달라고 얘기하면, 엄마는 얼굴에 잔뜩 인상을 썼다. 투박한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돈이 없다고 화만 냈다. 준비물이 없어서, 우산이 없어서, 엄마한테 혼이 나서 자주 울면서 학교에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모든 상황 속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무력한 어린아이여서 필요한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울며 서 있었다.

                            



이미지 출처 : pix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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