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우리를 이끌기도 하지만, 고문하기도 한다. 가느다란 희망의 끈보다 단단한 하나의 진실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 누군가에게 어려운 진실을 그대로 전할 용기는, 상대를 향한 존중과 진심에서 나온다.
아이 아빠는 다섯 살 가을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IT 시대에 태어난 하늘이에게, 아빠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이는 아빠를 만난 이후로 아빠가 그리워 울지는 않았지만, 아빠와 가끔 통화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아빠가 자고 있을 시간이야. 미국은 지금 한밤중이거든. 전화한다고 해도 아빠는 벨 소리를 듣지 못할 거야. 아빠도 하늘이처럼 한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가끔은 아빠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곤 했다. 전화를 걸어 봐야 아빠가 정말 자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실하지 않냐는 뜻이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는 척하며 “어? 미국은 지금 새벽 2 신데, 새벽 2시는 한밤중인데”라며 전화를 거는 시늉을 했다. 역시 아빠가 자고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줬다. 하늘이는 수긍했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다. 꼭 해야만 하는 숙제를 계속 미루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아이가 상처를 덜 받을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아이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TV에서 ’ 아이가 다섯‘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재혼가정의 이야기를 마음 따뜻하게 담은, 주말 연속극이었다.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평일과 주말 저녁,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는 드라마를 재미와는 상관없이 채널을 고정해 놓고 순서대로 시청해왔다. 평일 저녁엔 SBS에서 하는 드라마로 시작하여, 다른 채널로 넘어갈 순번이 정해져 있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극 중 소유진의 남편으로 나오는 권오중이, 아내인 소유진의 친구와 바람을 피워 이혼을 했다. 뒤늦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권오중이 아이들이 그리워 주변을 빙빙 돌다가, 3년 만에 아이들과 재회를 하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다고 울기 시작했다. 쉽사리 그칠 눈물이 아니었다. 함께 TV를 시청하던 가족들과 안타까운 눈빛을 주고받다가,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아빠한테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화해줘”
아이의 몸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Josh Hild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는 그동안 아이를 만나는 것뿐 아니라, 양육비조차 협의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형편에 맞는 금액이라고 터무니없는 일정 금액을 통장으로 입금하며, 양육비가 안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를 아이 아빠로서 존중해 주려고 했었으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양육비 청구 소송으로 권리를 주장하려던 참이었다. 아빠가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해달라는 아이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하늘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하늘이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사실은… 엄마랑 아빠가, 하늘이가 어렸을 때 헤어졌어… 하늘이 잘못이 아니야… 정말 미안해…”
6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몸에서 폐부를 관통하여 슬픔이 쏟아져 나와,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가슴도 찢어지는 것 같았다. 꿀럭꿀럭 몸을 여러 차례 떨며 품에 안겨 한참을 울던 아이는 기운이 고갈되고 나서야, 겨우 눈물을 그쳤다.
“하늘아, 아빠도 하늘이랑 헤어질 때, 지금 하늘이처럼 많이 울었어. 아빠도 하늘이와 같이 살고 싶어 했어. 그런데 엄마가 하늘이를 키우게 된 것은 아빠는 밥도 못 하고, 우리 할머니처럼 집에서 하늘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어서야. 아빠는 할머니랑 따로 살 거든. 하늘이를 잘 챙겨 줄 수가 없어서 엄마가 하늘이를 키우게 된 거야. 그리고, 엄마는 하늘이가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 아빠가 엄마한테 엄청나게 울면서 우리 하늘이 잘 키워달라고 부탁한다고 했어.”
“엄마, 그러면, 지금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거야?”
“지금 서울에 있어. 하늘이가 그때는 아기라서 말할 수가 없었어. 거짓말해서 미안해”
“엄마, 그럼 나 아빠를 못 보는 거야? 지난번처럼 보면 되잖아???”
“하늘아, 사실은 아빠한테 하늘이 말고, 다른 가족이 생겼어.”
아이의 두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가 다섯에 나오는 아줌마랑 아저씨처럼?”
“그래, 하늘아. 그래도 아빠는 작년에 하늘이를 만났던 것처럼, 계속 그렇게 만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던 것 같아. 그런데 하늘아, 하늘이는 아빠의 딸이잖아. 아빠와 하늘이는 가족인 거야.
만날 수 없어도, 아빠는 절대로 하늘이를 잊을 수가 없어. 엄마가 만약에 아빠처럼 하늘이를
볼 수 없다면, 엄마는 매일매일 하늘이가 보고 싶어서 울었을 거야.
엄마는 하늘이를 매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아이의 등을 계속 토닥였다.
“하늘아, 미안해. 마음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늘이 잘못이 아니야. 알았지?
하늘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야 해? 알았지? 어른들이 잘못한 거야.”
산책을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일부러 밖으로 나왔다. 등에 아이를 업고 걸어 다녔다. 아이의 그리움에 지친 심장이 하루빨리 편해지길 바랐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목욕을 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나란히 팔을 베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하늘이가 물었다.
“엄마, 아빠가 나랑 헤어질 때 그렇게 많이 울었어?”
“그럼, 엄청나게 울었어. 흑흑흑 꺼이꺼이,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어.
아까 하늘이처럼 울었다니까!”
“아빠가 울었다니 상상이 안 가.”
“아빠도 당연히 슬펐겠지~ 엉엉… 흑흑흑… 꺼이꺼이 어흑, 어흑, 어흑.”
아빠의 우는 모습을 흉내 내자, 어둠 속에서 하늘이가 까르르 웃었다.
“우리 아기 오늘 힘들었지? 잘 자~ 좋은 꿈 꿔~ 엄마가 너무 사랑해!”
“나도 사랑해, 엄마”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금세 잠이 든 것 같았던 하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그런데 신기해. 아빠랑 엄마가 헤어진 거랑 아빠를 못 본다고 생각하면 슬프긴 한데,
이상하게 나, 마음이 편해.”
진실의 힘이었다. 하늘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정말 아이가 아니었다. 진실로 하늘에서 나를 가르치려고 지구별로 특파된, 스승 특파원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래 묵혀 두었던,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