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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Nov 25. 2021

2-9. 처음 맛본 초콜릿, 카카오 92%의 씁쓸함

인생에서 아빠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처음 맛본 초콜릿, 카카오 92%의 씁쓸함

알고 있는 초콜릿의 맛과 전혀 다른 맛의 초콜릿을 맛보았을 때의 당혹스러움, 삶 속에서 우리는 가끔, 혹은 자주, 약간, 혹은 많이, 그런 경험을 하곤 한다. 삶의 순간들은 우리의 예상대로만 펼쳐지지 않는다. 만약 모든 순간이 우리의 예상대로 펼쳐진다면, 삶이 어떤 느낌일지 오히려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것이 삶이기에,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절망의 순간,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것들도 그것이다.




하늘이가 태어나 대략 8개월 차에 헤어지고,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을, 그에게 연락을 했다. 아이와 주기적으로 만나기로 한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는 미국에서 자신을 만나러 나올 아빠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이와 주기적으로 만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 봐야 했다. 아빠라는 존재에게 아이와 앞으로 만날 계획이 있는가를 물어본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새로운 가정이 생긴 그와 그동안 아이를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당연했다.


주변에서는‘그런 아빠’라면 내 선에서 일찍 정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도 했지만, 엄마라는 이유로 하늘이와 아빠의 관계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회성으로 끝나버리거나,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실망감을 안겨줄 때, 아이가 받을지도 모를 상처였다. 그는 아이가 보고 싶고, 앞으로 계속 주기적으로 아이를 만날 의향이 있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엄마~ 나 아빠 만날 생각하니까 너무 기대가 돼!!”     


하늘이는 어느 가을날,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만으로 충분히 그리운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동물원에 가기 위해 집 앞으로 데리러 오는 아빠를 기다리며, 아이는 내내 들떠 있었다. 아빠의 차가 단지에 들어와 차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늘이는 내가 아빠라고 알려주기 전까지 전혀 아빠를 알아보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었다. 10월 초의 햇살이 뜨거워 한낮엔 반팔이 어울릴 법도 한 날씨에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그 역시 하늘이에게 좋은 인상을 보이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아” 하고 부르며,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하늘이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쭈뼛쭈뼛하며 구조요청을 하듯 나에게 신호를 보내다 내 뒤로 몸을 숨겨 버렸다. 나 역시 그와 오랜만에 마주했고,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와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하늘이도 가볍게 인사를 유도한 다음, 함께 차에 탔다.     

하늘이는 자동차 뒷자리에서도 나에게 바짝 불어 앉아, 아빠의 질문에는 한마디도 못 하고, 몸을 꽈배기처럼 비틀어댔다. 그러다 내가 그와 얘기를 주고받을 땐, 어김없이 아빠를 힐끔거리며 바라봤다. 하늘이와 내가 장난을 치거나, 그와 내가 형식적인 대화를 할 때를 제외하고, 차 안에는 자주 정적이 흘렀다.


길이 막혀서 도착하면 점심때가 지날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동물원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동물원 근처의 돈가스집이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그가 밖으로 나가더니 선물상자 한 아름을 가지고 나타났다. 차에서 긴장이 조금 풀어진 그것도 작용했겠지만, 아빠의 선물에 신난 하늘이의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많은 날의 어떤 특별한 일상이겠지만, 하늘이에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는 특별하고, 특별한 날이었다.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선물상자 안에는 바비인형과 바비의 친구 라켈인형, 그리고 초콜릿을 녹여서 틀에 찍어내는 ‘초콜릿 만들기’ 기구 장난감이 들어있었다. 상자를 하나하나 뜯어볼 때마다, 하늘이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동물원으로 올라가는 리프트에 몸을 실었다. 리프트에 앉아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가족들을 바라보니,‘우리가 그때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진짜 가족처럼 우리도 저렇게 살고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평범한 가족으로 보겠지?’ 이미 남편이라는 존재의 부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전혀 현실성 있게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그가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머리를 흔들었다.     


깊은 가을로 접어드는 동물원엔,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동물원을 좋아하는 하늘이와 나는 동물들이 반가워서 어색함도 잊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것 같았다. 그가 하늘이를 안아 주고 목마도 태워주면서 애를 쓰긴 했지만, 아빠에게 안겨 있는 하늘이의 몸통이 아빠를 향해 감기지 못하고 일자로 쭉 펴져 있는 어정쩡한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저녁에 일정이 생겨 오래 있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몇 년 만에 만난 아이인데 저놈은 여전하구나. 와이프 몰래 나온 것이 분명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짧은 아빠와의 만남을 서운할까 봐,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동물원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았다.     


점심 무렵에 만나 도로에서 보낸 시간, 점심을 먹고 동물원 입구에서 줄지어 주차를 한 시간에 비해 동물원에 있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여러 동물을 보지 못하고, 엄선하여 봐야 했다. 이를테면 ‘밀림의 왕 사자는 꼭 봐야 한다’는 식이었다.     


 만약에 ‘우리 둘, 하늘이와 내가’이 동물원에 왔다면, 밀림의 왕 사자부터 아기 동물들, 파충류까지 동물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너무 귀여운 수달은 한 번 더 찾아갔을 것이다. 동물원이 문을 닫을 시각이 되어서야 “동물들아, 안녕, 나는 하늘이야~ 다음에 또 올게”를 연발하며 레드 카펫을 걷듯, 동물 친구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걸어 나왔을 게 분명했다.


만으로 4년을 다 채우고 만난 아빠와의 시간치고는 너무 허무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밀림의 왕 사자를 유리를 통해 바로 볼 수 있는 과천 동물원의 사자 카페에서, 그가 하늘이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진 몇 컷을 찍으며,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는 아빠와의 사진이 되면 어쩌지…’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도 안 먹고 왔는지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하늘이 앞에서 아빠의 욕을 늘어놓을 게 뻔해서, 그저 아빠에게 받은 선물로 재밌게 노는 하늘이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 나 라켈 인형 정말 갖고 싶었어!”     

Karolina Grabowska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런데, 아빠를 만나고 온 소감을 묻는 말에는, 그냥“좋았어.”라고만 대답하고는, 집에 있는 인형을 모조리 늘어놓고 인형 놀이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늘이의 다섯살생에서 아빠를 만난 것만큼 큰 이슈도 없을 텐데 그냥 “좋았다”라고만 말하는 하늘이의 표정은 하늘이가 아빠를 그리워했었나? 싶을 정도로 무심해 보였다. 다음날 목욕을 하며, 물놀이를 하는 하늘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오늘 누구랑 놀았어?”라고 물어보듯 그런 가벼운 어조였다.      


“하늘아, 아빠 만났을 때 어땠어?”


하늘이가 튜브 인형에 물을 담았다가, 아래로 비우며 말했다.


“좋았어.”


마찬가지로 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니 그런 것 말고, 만나서 반가웠는지 어땠는지 그런 거 있잖아?”


“엄마, 아빠 원래 그렇게 몸이 컸어? 깜짝 놀랐잖아!”


손에 들고 있던 튜브를 내려놓고, 무언가 불만이 있다는 듯 나를 보았다.


“…어… 엄마가 그러지 않았나? 왜? 그래서 아빠 싫어? 별로였어?”


“그냥, 별로 맘에 안 들어!”


“잉잉???”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늘이의 답변이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하늘아~ 왜?? 아빠가 어디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데??”


하늘이가 다시 내려놓았던 튜브에 물을 담으며 말했다.


“얼굴이랑, 몸통”


“잉?? 얼굴이랑 몸통???”


“풋…”하고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다시 물어보았다.


“하늘아, 얼굴이랑 몸통이 맘에 안 들면 다 맘에 안 든다는 거잖아?

 그러지 말고, 아빠가 하늘이 엄청나게 예뻐했는데 하늘이도 아빠 좋은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


“팔”

다음 대답을 재촉하듯, 하늘이에게 되물었다.


“팔???”


“팔이랑 시계, 마음도 좀 좋은 것 같아”


“팔??? 팔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하하”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이는 당분간 아빠가 그렇게 많이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아빠 만났으니까 이제 괜찮아~ 엄마~” 라고 하늘이는 말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내가 TV 드라마에 송중기, 김수현, 이승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좋아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스타일대로 아빠를 상상했다고 한다.  아빠도 당•연•히 그런 모습일 거라고…

그러나, 그 환상은 무참히 깨지고, 하늘이는‘현 타(현실 자각 타임)’를 제대로 겪은 후, 한동안 아빠를 많이 그리워하지 않았다.      



물론 하늘이에게 진짜‘현 타’는 ‘자신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 아빠를 확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고 미국에서 돌아오면 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은 그리운 현실을 살아갈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하늘아, 엄마가 그랬지? 아빠가 너처럼 예쁜 아이를 낳은 것은 정말 성공이라고, 내 말을 안 믿은 거야? 하하하 ”     


“그래도 그렇게 몸이 큰 줄은 몰랐지! 히히히”





이미지출처 : Juan Pablo Serrano Arena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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