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이사 갈 수 있을까

by 혜인


엄마, 아빠는 2003년부터 한 동네에 살았다. 동네에 딱히 친구도, 가족도 없는데도 동네를 좀처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어느 한 곳에 살면 그 생활권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겠구나,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지만 실은 크게 공감하진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요즘 그런 생각이 부쩍 든다.


우리 신혼집은 남편과 나 모두 연고가 없는 동네다. 그런데 네 번의 계절을 세 바퀴 도는 동안 우리는 낯설었던 이 곳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서울 답지 않게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어딜 가나 보이는 북한산이 주는 포근함, 그리고 의외로 아기자기한 사람들과 가게들까지, 날이 갈수록 이만한 곳이 없다며 좋은 감정을 나누고 있다. 그러다 실은 다른 이유로 얼마 전, 이사 계획이 생겨 집을 내놓았다. 처음엔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마음이 들뜨기만 했는데, 이내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한 우리의 첫 보금자리를 떠날 생각에 벌써 마음이 슬프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20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모르게 3년 동안 정이 너무 많이 들었다.


동네에 대한 '정(情)' 은 추상적이기보단 매우 구체적이다. 떠난다는 아쉬움도 마찬가지로 아주 세부적이고 명확한 형태의 감정이다. 무엇보다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머리를 자를 때가 되면 어디로 가야 하지. 몇 번을 돌다가 정착한 남편과 나의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 참 좋은데. 토리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펫시터 분과 유치원이 새로 이사 갈 동네에도 또 있을까. 기가 막힌 비건 식빵을 파는 베이커리도 생각날 것 같고. 가끔 인사를 나누던 윗집 가족과,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이 집에 살았고, 지금도 옆 라인에 사시는 기분 좋은 부부도. 우리를 좋아해 주시는 단골 식당이나 가게들은 어쩌지.


엄마, 아빠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동네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는 없다. 하지만 어설픈 친구보다 더 진심으로, 서로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많은 좋은 인연이 여기에 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동네에서 만나게 된 인연으로 좋은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에 있다는 이유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 사람들. 비대면 시대에 다양한 소통 방법이 있지만 우리를 엮어주던 동네라는 끈이 사라지면 아무래도 소원해지겠지. 자주 걷던 길, 자주 보이던 풍경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주었던 위로와 안정이 있다. 다른 곳에서도 우리는 그 감정을 받으려 애쓰겠지만 그 좋은 기억이 흐려질 것을 생각하면 섭섭하지 않을 수 없다.


뿌리를 내린다는 진부한 표현이 떠오른다. 분갈이를 하면 생명이 위태할 정도로 중심의 뿌리가 깊이 박힌 건 아니지만, 자잘 자잘한 잔뿌리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뻗어갔나 보다. 아, 우리가 집을 내놓고 시장이 침체되어 한참 동안 집이 팔리지 않고 있다. 계획한 게 이뤄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한편, 만개하는 봄을 지나며 잠깐 다행인가 싶었다. 이러다 우리 이사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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