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일까? 기대 일까?
다음 날,
나는 말끔한 캐주얼 정장을 입고,
방송국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밟는 서울의 거리는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고국이라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방송국 로비 안으로 들어가,
박서우 피디를 기다린다.
익숙지 않은 공간이다.
유리로 된 건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손에 커피를 들고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지는 발걸음들.
나는 갑자기 미아가 된 아이처럼,
서우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송원 씨, 오셨어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니 서우가 서 있다.
낯선 곳,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서
아는 단 한 명의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워 손이라도 잡을 뻔했다.
“죄송해요. 셰프님이라고 부르는 건 빼서요.
제가 하는 기획이 워낙 일급비밀이라,
셰프님이라는 게 알려지면 안 되거든요.”
그녀는 정말 첩보 영화 속 인물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습니다.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늘 그렇듯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앞장선다.
그녀는 의자가 몇 개 놓인 작은 회의실로 나를 안내한다.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연출 강기원입니다.”
“안녕하세요. 방송작가 김석영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셰프님”
작가 김석영의 셰프님 발음이 예사롭지가 않다.
자리에 앉자 서우가 준비해 온 자료를 나눠 주고,
조연출이 화면에 프레젠테이션을 띄운다.
“다들 인사 나누셨으니,
바쁘시니까 빠르게 브리핑하겠습니다.”
미국에서 단둘이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그녀.
리더십도 있고,
아이디어도 명확했고,
무엇보다 회의 진행이 빠르고 정확했다.
“그러니까 최종 10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누가 참여하는지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내 질문에 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래서 미팅도 이렇게 한 분씩 따로 하고 있어요.
누가 참여하는지는 저희 셋만 압니다.”
“대본도 없고요?”
이번에는 작가 김석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한다.
“작가는 있지만, 대본은 없어요.
셰프님들을 만나면서 ‘이 분에게는 이런 질문이 좋겠다’
생각하며, 질문지를 만들고 있어요.
심사위원분들께도 박 피디가 준 진행 방향에 맞춰
참고 멘트 정도만 쓰고 있고요.
박 피디랑 일하면서 이렇게 쉽게 일한 적은 처음이에요.
그렇지? 박피디."
그는 풍채가 좋고,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고,
목에는 짧은 스카프를 둘렀다.
헤어 디자이너나
패션 디자이너처럼 보이는 차림에,
목소리는 나긋하고 부드럽다.
“박 피디님 좀 아세요?”
그가 나를 보며 또 묻는다.
나는 네라고 해야 할지,
아니요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진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는 서우만 알지만,
사실 그녀에 대해 잘 모른다.
“여기 박 피디님, 예능 프로에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프로그램들, 다
박 피디 작품이에요. 예능계의 미다스라니까요.”
“다 작가님이 잘 써주셔서 그렇죠.
기획만 좋으면 뭐해요. 티키타카가 중요하지.”
“이래서 내가 박피디한테서 못 벗어난다니까.
이번엔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감사해요, 작가님.”
“그래도 이번엔 대본 분량이 거의 없으니까,
나는 좀 쉬엄쉬엄 가겠어.”
작가는 웃으며 테이블 위 간식을 집어 든다.
“대신 이번엔 제가 장렬히 전사할 것 같아요.”
조연출 강기원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딱 봐도 이제 막 현장에 익숙해진 듯한,
3–4년 차 직장인의 얼굴이다.
“이번에 이걸로 확 떠서,
부서 옮기면서 신입 딱지도 떼면 좋잖아.”
서우가 그의 어깨까지 툭툭 치며 말한다.
둘은 가까운 선후배처럼 보인다.
“피디님 계획대로 되기 전에
제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조연출이 말이 맞다고 동의한다.
규모도, 참가 인원도, 식재료 준비부터 장소,
블라인드 진행을 위한 보안,
카메라 장비까지—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방송 전까지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저나 조연출에게 연락 주세요.”
방송작가 김석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나서 반가웠어요. 셰프님.
너무 잘생긴 셰프님이 오셔서 놀랐어요.
모델하셔도 되겠어요.”
“별말씀을요.”
“10위 안에는 들어가셔야 방송에 얼굴이 공개돼요.
개인적으로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김석영이 먼저 가고,
강기원은 새 장비가 와서 점검하러 간다.
그들이 가고,
회의실에는 서우와 나만 남는다.
“정신없으시죠?” 서우가 간식을 내밀며 말을 잇는다.
“간식 좀 드세요. 저도 당 떨어졌어요.”
그녀도 간식 사이에 있는 초콜릿을 입에 문다.
“규모가 미국에서 설명해 주셨던 것보다 훨씬 커서 놀랐어요.”
“저도 놀랐어요. 판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도 신나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카메라도 새로 장만했어요.
얼마나 멋지게 담길지 기대돼요.”
그녀는 천상 방송국 사람처럼 보인다.
나도 천상 요리사처럼 보일까.
“그나저나, 셰프님. 10위 안에는 들어야 방송에 나오고,
다른 셰프님들도 보실 수 있어요.”
“첫 회에서 떨어지면 끝나는 거죠?”
“네. 그래서 열심히 하셔야 해요.
그래야 방송국도 계속 오시고…
저도 셰프님 계속 볼 수 있죠.”
그녀의 말이 모든 셰프에게 하는 응원일지,
나에게만 건네는 말일지 잠시 궁금해진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다.
다른 셰프들도 섭외하기 위해 만났을 것이다.
그녀는 그들과 어떤 얼굴로 마주했을까,
이것도 궁금하지만 묻지 않는다.
요리에 대한 욕심도 생기고
또 끝까지 오래 남아
방송국에도 더 오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드디어 시작되는 첫 경연.
이름도, 얼굴도 가려진 채
오직 한 접시의 요리로만 평가받는 무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구독하고 함께 하세요.
#SoulFood #요리와사랑 #감성소설 #연재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