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e, 샌프란시스코
엘레나는 명우를 ‘uncle'이라고 부르며,
그의 영어에 까르르 웃고,
장난을 치며,
가깝게 대한다.
현정도,
명우를 특별하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체면을 차리 거나,
그런 척하지 않아도 되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어서,
가까운 친구 혹은,
막내 동생처럼 편하다.
명우도 종종, 현정의 집에 놀러 와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은 종종 근처로 여행을 다닌다.
명우는 미국에서 가깝게 지내주는 현정이 고맙고,
엘레나는 그의 조카처럼 귀엽기만 하다.
7월이 되면서,
엘레나는 토드를 다시 만나러 가기 시작했지만,
매주 만나던 것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술과 파티를 좋아했던 토드는,
격리기간 동안 사교 모임을 할 수 없었고,
외로움과
그의 주변 상황의 괴로움으로
그만 만나기로 했던,
케서린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격리가 조금 완화되면서,
케서린은 그녀가 아는 이들을,
토드의 팬트 하우스에 초대했고,
토드는 그들과 함께 약을 하기 시작했다.
토드는 내뿜고,
흡입하는 약을 통해,
아버지의 병세,
엄마의 극심한 히스테리,
형과 누나의 비난,
현정에 대한 아쉬움과 죄책감,
엘레나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
아주 잠시 평온함을 느꼈고.
그 잠시의 시간을 좀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복용했다.
그리고, 엘레나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토드는 술과 약을
끊어 보려고 했지만,
그의 중독은 빠르고 깊게,
그의 육체와 정신에 영향을 미쳤고,
토드는 점점 더,
조절할 수 없어졌다.
하지만 엘레나를 만나지 않을 순 없다.
보고 싶고,
매일 함께 하고 싶고,
엘레나의 뺨을 만지고,
그녀의 작은 가슴에 머리를 대고,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싶고,
땀 냄새가 배인 그녀의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고 싶고,
작은 손가락으로, 포크질을 하고,
색연필질 하는 것을 보고 싶고,
그녀의 또랑 또랑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Daddy.’
‘Daddy.’
‘Daddy.’
그를 ‘daddy’로 만들어 준,
작지만 위대한 존재.
토드는 정신이 들 때면,
모든 것을 그만하고,
모든 것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이내 곧, 가빠지는 숨을 참을 수 없고,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없어,
마시고,
복용하고,
그리고,
일어나 보면,
케서린이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한심함으로,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토드가 살아오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이다.
엘레나를 만나는 날,
귀하고 귀한 그 시간.
하지만,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야 하는,
진짜 이유를 현정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여전히 위독하셔서,
코로나도 아직 위험하니까,
라는 이유를 댔다.
한 달에 한번,
1박 2일,
하루 종일 종알 되고
‘mommy’를 찾는 이가 없는,
주말,
현정은 집 청소를 구석 구석 하고,
소파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불멍
물멍
이 있듯이
이건
창멍
이다.
문득문득,
그가 생각나기도 한다.
사실,
한 번도 생각에서 지운적이 없다.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남아서 일 것이다.
그리움.
현정이 가장 많이 외면하고,
담아 두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그저 함께 한 시간들을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감정은
현정의 마음을 늘 아프게 찌른다.
현정의 가슴에 박혀,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이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으니,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가 선택한 그리움이고,
선택한 아픔이다.
어떤 날은,
현정은 러닝 클럽 때 다녔던 트레일에,
명우를 데려가 좀 오랜 시간 하이킹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 현정은,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아빠 재철에 대한 이야기.
미국에서 살았던 이야기.
우울증.
결혼,
그리고,
이혼.
이런 이야기들을 산길을 걸으며,
지나간 추억처럼.
그는 묵묵히 듣거나, 맞장구를 치거나,
정말요? 하면서 놀라거나,
혹은 같이 웃거나, 울기도 한다.
‘Dr. Meghan’에게도 이혼에 대한 이유를,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었다.
혹시 차트에 남을 까봐.
환자 정보가 공개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누군가 알게 될 것 같아서,
의사도 이곳 사람이니,
의사한테 조차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슨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우에게는 제이슨과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때의 추억들이 떠 오르면서,
어머 우리가 그때 그랬네
하며,
다시 상기하고는 ,
그런 거였구나
하면서
재 해석 하다,
쑥스러워져서,
“명우야, 내가 너보다도 어린 친구를 만난 거야? 정말 그때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
라고 말하며,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현정은 제이슨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
어느 날, 명우는,
“누나. 나 그분 누군지도 모르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 길 가다 만나면 아는 사람처럼 ‘hi’ 하겠어요.”
“내가 그렇게 많이 말했어?”
“네. 기승전 제이슨 이죠.”
남자 친구 생기고 이러면 친구한테 막 털어놓고,
자랑하고 싶은 것처럼,
현정도 그러고 싶은가 보다.
이제 와서,
도망친 후에,
그래도,
지금이라도,
겨우 그의 이름을 말하고,
그와의 있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은 일들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듯 이야기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명우는 현정에게 그렇게 좋고 생각나면,
다시 만나봐도 되지 않냐며,
글 쓰기를 다시 해보라고 할 때처럼,
말했다.
현정은 글을 다시 쓰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봤지만,
제이슨을 다시 만나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심각하게 생각해 봐도,
그녀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도망친 이 상태로,
그냥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남아,
잊혀 가는 것.
그렇게,
2019년 봄,
이혼,
그 해 여름 동안 달린 "Coastal trails hiking,”
두 계절을 함께 보낸,
짧지만 강렬했던 그와의 만남,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세계 대 질병,
격리,
그리고
8월이 되었다.
작년 그 해 같은 여름.
하지만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여름.
그리고 그 여름이 지나고,
9월에,
명우는,
한국으로 떠난다.
일 년 어학연수 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는 6월에 동부 여행 계획이 있었는데,
아직 그곳 까지는 갈 정도로 격리가 해지된 것은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 더 머물며,
현정과 엘레나와,
여름을 보냈다.
현정 덕분에, 북부 캘리포니아 여러 곳을 여행해서,
그것도 좋았다고 명우는 말했다.
현정이 명우를 공항에 데려다준다.
그때 그처럼.
“누나 종종 연락해요. 페이스 타임도 하고. 아. 엘레나 많이 보고 싶을 거 같아.”
명우도 페이스 타임을 하자고 한다.
그때 그처럼.
현정은 같은 말이지만,
그때와 다른 의미로
그래
라고 대답한다.
그때의
그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라는 의미의 그래 이고,
지금의 그래는
그래 또 보자 라는 의미의 그래 이다.
“그래. 명우야. 조심히 가고, 또 보자.”
엘레나가 토드랑 가지 않는다고,
아침에 한창 실랑이를 벌인다.
“I wanna go to the playground with uncle. “
현정은 엘레나에게,
명우가 한국으로 돌아간 것을 말했는데도,
엘레나는 종종,
“When is uncle coming?” I wanna meet uncle.”
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한국은 이곳에서,
그저 샌프란시스코 정도 나가는 거리라
생각하는 건가?
leave’
떠나다
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지.
“You are going to meet daddy today.”
“Daddy is not fun.”
“Why he is not fun?”
“Not fun. He is not going to go playground.”
“You can ask him to go to the playground.
He will be happy to go there with you and make you fun today.”
전에 토드는,
엘레나와 함께,
캠핑도 가고,
바다도 가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갔었다.
지금은 모든 상황이 달라졌고,
토드의 아버지도 병환 중이고,
토드도 겨우 숨만 쉬며 사는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다.
“Cookie. Mommy, let’s make a cookie.”
그때 현관 벨이 울린다.
벨이 울리자,
가기 싫다던 엘레나는
‘Daddy’ 하고 부르며,
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간다.
현정이 문을 열어 주자,
엘레나는 달려 나가,
폴짝 뛰어 토드에게 안긴다.
“Daddy. daddy. I wanna go playground.”
“Yes, sweetie, we can go playground.
And Ta- da, I bought a new bicycle for you.”
“Bicycle? Wow.”
엘레나는 새 자전거라는 소리에 흥분하여,
안겨 있던 토드에게서 나와,
마당으로 뛰어 나간다.
토드가 엘레나를 따라 나가고,
현정은 엘레나의 가방을 들고 나온다.
“Did you buy her new bicycle?”
“Yeah. I am going to teach her how to ride
a bike. Actually, how to ride a bicycle is from
dad.”
토드는 'balance bike’라고 부르는,
자전거에 페달이 없이 두 발로 땅을 구르며 움직이는,
2세 정도부터도 탈 수 있는 것으로,
일반 자전거를 타기 전,
연습용으로 타는 것을 산 것이다.
“Be careful.”
“No worries, I will keep her safe.”
“How have you been? How is your father’s
condition?”
서로 3 주만에 보는 얼굴이다.
“He is still same level of symptoms and pain.
How are you? Is everything ok?”
“I am ok.”
토드의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다가,
집으로 홈 케어를 하러,
퇴원했지만,
얼마 전 응급실로 갔고,
지금은 중환자실에 있다.
토드는 전처럼,
매력 넘치는 눈으로 웃음을 짓던,
모든 것을 가진 듯,
여유 로워 보였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회색빛 얼굴에,
핼쑥하고,
건조해 보인다.
그런 그에게,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줘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다.
엘레나의 안전벨트를 매 준 토드는,
현정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고는,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른다.
“See you on Sunday morning.”
“Yes.”
토드가 운전석에 앉고,
창문을 열어 주자,
엘레나가 손을 흔들며 말한다.
“Mommy. Mommy. Bye. ”
“Bye, honey. Love you.”
토드는 잠시 머물다 천천히 차를 몰고 가면서,
백미러로 현정을 본다.
마음에 휴식을 느끼게 해 준 여인,
가만히 함께 앉아 있기만 해도,
편안했던 여인,
뜨겁지도 달콤하지도 않았지만,
늘 같은 향이 나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던 여인,
그에게 새 생명을 안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여인.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와 함께 햇살이 비취는 의자에 앉아,
그녀가 주는 차 한잔을 마시며,
엘레나가 걸어 다니며,
종알 종알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천천히,
조용히 흘러가는,
그 시간에 머물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이 일상의 삶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인데,
토드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후회가 된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와 상담가를 찾아가,
그녀의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함께 있어 주고,
그는 중독 치료를 받고,
그리고 부부 상담을 받고 싶다.
상담을 받고 나 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어느 카페에 들러,
달달한 ‘chocolate salted caramel donut’과,
우유와 시럽을 가득 넣은 ‘Latte’를 함께 마시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Hyunjung, no worries. You are ok, you will be
fine. I will be with you. We will be fine.”
모든 것이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함께 있어 주겠다고,
우리는 모두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현정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냥 살던 방식 대로,
생활 대로 그렇게 살 것을,
가정,
결혼,
아내와 아이를
감당하기에는
미성숙했던 것일까.
현정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잠시 서 있는다.
띵동
문자가 온다.
’나야. 제이슨. 잘 지내?’
현정은 그가 단념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녀를 서서히 잊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그녀는,
그대로 서서
그의 문자를 한참을 쳐다본다.
나야
잘 지내
겨우 두 문장.
하지만 그녀에게 복잡하게 얽힌
많은
생각들과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제이슨은 그 이후로,
그가 한국에 도착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혹은 이틀에 한번 정도 현정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누가 보면
마치 스토커처럼
마치 미친놈처럼
누가 보면
사랑에 진상 떠는 놈처럼
가까운 친구에게 이야기한다면,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미친놈아
여자가 그렇게 떠난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런 나쁜 X 잊어.
다른 여자를 만나
주변에 있는 누구 소개라도 시켜 줄까?
제이슨은 그런 말을 해 줄 친구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이 스토킹은 아니다.
그저, 허공에다 말하듯,
잘 지내?
어떻게 지내?
‘Is everything ok?’
라는 문자만 보낼 뿐이니.
미친놈은 맞다.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미친놈이다
사랑에 미친놈.
한번 사는 인생,
사랑에 한 번쯤 미쳐 보는 게 뭐 나쁜가.
제이슨은 어느 날부터 그녀에게 보내는 문자가
안부 정도를 넘어,
그냥 일기 쓰듯이,
자신의 하루와, 감정을 보냈다.
그녀가 문자를 읽던,
이 문자가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던,
답장이 없던 상관이 없어졌다.
그냥 일기처럼,
습관처럼,
쓰고,
보내기 박스를
클릭했다.
한 달 넘게 연락을 안 한 건,
그의 상황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1년 더 연장했던 회사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고,
여전히 집에서 자택 근무를 하고 있으며,
한국의 군복무도 생각해야 했다.
그린카드를 신청해 미국에 머물러야 하나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렇게 자택 근무를 할 거면,
미국에 혼자 있는 것이 맞나 라는 생각도 들고,
군 복무를 더 미룰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계획들 속에 여전히 현정을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더 결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기 위해,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오겠다고 결정할 때도,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할 때도,
석사 과정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정할 때도,
회사에 입사 원서를 지원할 때도,
이렇게 신중하게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하고 싶다.’
그 생각 하나였고,
하고 싶기에,
그냥 도전했고,
도전한 결과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하고 싶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부터 들어,
계획도 도전도 할 수가 없다.
그는,
일단 군복무를 마치자
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고 싶거나,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보다는,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민이 좀 줄었다.
어느, 토요일,
제이슨은 운전해서, 현정을 만났던 소살리토의 식당으로 간다.
그녀와 밖에 앉아, 미모사를 마셨던 때가 떠오른다.
작년 이 맘 때,
현정을 처음 만났었다.
불과 1년 전이고,
그녀와의 만남은 겨우 4개월 정도였다.
하지만,
그동안 모든 것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그의 마음도 가장 많이 복잡하고 힘든 때였다.
‘Bay’의 초저녁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카락,
슬픔을 간직한 듯한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시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엷게 미소 짓던 입술,
그리고 하얀 티셔츠와 카디건.
이제는 어딜 가도,
청바지에 하얀 티, 카디건을 걸친 사람이 있다면,
그녀라 착각하고 달려갈지도 모르겠다.
현정은 ‘Tiburon’에 산다.
티뷰론의 베이를 보며 운전을 한다.
가던 길은 깜깜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집에서 나올 때 보던 길은,
바닷물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이는 길을 달려 나왔었다.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만큼,
그의 마음도 설레고,
반짝거렸다는 기분이,
지금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티뷰론 동네에 들어서자,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운전을 한다.
차 한 대만 지나갈 정도의 좁은 언덕길을 올라갔었다.
그녀의 집 거실에서 ‘bay’
그리고 ‘bay’ 너머, 샌프란시스코 도시가 멀리
보였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거실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취미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도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석양이 지고,
그렇게 하루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연락 없는 이를,
한번 가 본 기억으로 찾아가는 이를 정말 미친놈,
혹은 스토커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제이슨은 그가 정신이 온전 한거 같진 않다.
그래도 한국으로 가기 전,
한 번은 보러 가고 싶었다.
볼 수 있다는 장담은 못하지만
만나려고 시도했다는 그의 마음과 행동에
나중에
덜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는 희망은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까.
무엇이 됐든,
그녀가 아직 이곳에 있다면,
스쳐 지나듯 이라도 보고 싶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길을
몇 번을 맴돌다,
현정의 집과 비슷해 보이는 집이 있어,
잠시 차를 세운다.
현관문 위에 달린 풍경을 보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더 자세히 앞으로 가서 보고 싶어,
차에서 내리 펴는데,
풍경이 달린 집의 문이 열리고,
여자 아이와, 남자가 나온다.
제이슨은 다시 차 문을 닫고, 저 집이 아닌가 하며,
차를 돌리려 차 시동을 거는데,
뒤에 여자가 걸어 나온다.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
현정이다.
제이슨은 현정이 아이를 안아 주고,
남자가 아이를 차에 태우고,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현정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다.
이혼이든 별거든,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워낙, 이혼이나 별거 가정이 많고,
아이를 50대 50으로 양육하는 경우가 많아,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가는,
미국 드라마에서 본 익숙한 풍경이다.
그녀는 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바라본다.
그도 차 창문 너머로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여전한 모습이다.
그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
푹 빠져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그녀.
그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다.
’나야. 제이슨. 잘 지내?’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보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핸드폰을 보며
그대로 서 있는 그녀를,
제이슨도 그대로 차에 앉아,
한참을 바라본다.
결혼했으면 어때?
나를 만날 때 네가 외도를 한 것이었다면?
몰라,
나는 지금 그것도 괜찮아.
너의 배우자에게 미안하지만,
그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을래.
별거 중이라면?
뭐 어때?
이혼했으면?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데 문제는 더 없는 거 아니야?
아이?
같이 키우면 되지.
나이?
그건 문젯거리도 아니지.
아무튼,
이런 거 다 상관없고,
나는 너라는 사람을 그냥 사랑한 거야.
그는,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안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보고 싶었어.
하지만, 그녀가 말없이 떠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짐작은 가지만,
떠날 이유라고 납득은 되지 않지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프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
그녀의 선택,
그녀의 상황을,
존중해 주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상황도 지금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당장 그의 앞날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현정에게 가서 뭐 하고 말할 것인가.
군대도 갔다 와야 하는데,
고무신이라도 주고 가야 하나.
아니면 한국 갔다가,
2년 후에는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해야 하나.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현정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그렇게 한참을 더 있다가,
차를 돌려 나온다.
제이슨은, 그녀를 보고 나니,
미국을 떠나야겠다는 확신이 더 생겼다.
그녀가 어디 있고,
어떻게 있는지 알기 때문에,
이제는 문자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그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방향을 잃은 듯한 삶의 나침표
군대에 대한 막연함에서 오는 걱정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하고,
잘하고 싶은 부담감과,
마무리에 대한 바쁨
있던 곳을 떠나기 위한 정리로 인한 분주함
그리고, 잊어야 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은 희망과,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절망.
이런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 속에서,
회사에서 하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다음에 다시 와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까지 전달하고,
9월 초,
한국으로 귀국 후,
입대 지원서를 내고,
그 해,
겨울이 되기 전,
군에 입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