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오늘의 단어집 펴보기]
우연히 백화점에 들렀는데 새로운 서점이 보였어요. 서점에 들러 여러 책을 살펴보다가 지난해에 꼭 읽고 싶었던 유유 출판사의 <우리말 어감사전>(말의 속뜻을 잘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책과 마주했습니다. '오늘의 단어집 펴보기' 코너를 기획하며 자연스레 사전, 단어와 관련된 책에 한 번 더 눈길이 가네요. 여러 면을 살펴보다가 이 단어에서 시야가 꽂혔어요.
'사숙'
"사사는 스승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이지만, 사숙은 마음속으로만 스승으로 섬길 뿐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는 것이다. 곧 스승에게 사사를 받을 수 있지만 사숙을 받을 수 없다.
사사는 대체로 예술이나 기예 등을 익힐 때 택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도제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사숙은 스승으로 섬길 이를 현실적으로 만날 수 없거나 만나기 어려워 그의 작품이나 책, 행적 등을 통해
사상이나 지향하는 바를 본받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말 어감사전> 중
대면 즉 오프라인 만남을 통해 가르침을 직접 받거나 배우는 과정의 경우 '사사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죠. 유독 예술계에선 스승에게 '사사'하는 경우가 잦은 편입니다. 눈으로 옆에서 보고 따라 배워야 그 행위를 몸으로 체감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비해..'사숙'은 책과 영상 강연 등을 통해 학문이나 예술 등에 뛰어난 이를 마음 속으로 스승 삼아 본받고 배우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비대면하기 어려운 지금의 상황에서는 '사숙'할 스승들을 만날 계기들이 더 많아질 거 같습니다. 저는 코로나가 없을 시기에도 책과 영상물을 통해 사숙하는 스승님을 만나왔던 거 같아요.
10대부터 잡지와 인터뷰 콘텐츠를 좋아했기에 인터뷰를 능숙히 잘하고 글을 잘 써왔던 주간지<씨네21>뿐만 아니라 월간지<보그>,<바자>,<엘르><아레나옴므코리아>,<지큐코리아>,<럭셔리>,<마리끌레르> 등 이밖에 <매거진B>, <어반라이크>,<어라운드>,<컨셉진> 등 다채로운 매거진을 만드는 에디터 분들이 저의 사숙의 대상이었습니다.
2020년 9월 리추얼 세계에 빠져들면서,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를 통해서 처음 만난 리추얼 메이커 미아(정재경) 선생님을 만납니다. <일간정재경> 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지속적인 글쓰기를 통해 매년 1권씩 출간하면서 총 3권의 저자이며, 더리빙팩토리와 크루시 등 다양한 브랜드를 운영하는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 활발히 활동하시는 모습도 멋지십니다. 일하는 엄마이시고요.
돌아보면 사숙할 대상들은 많습니다. 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한 사물에 초점을 맞춰 존경의 마음을 가질 때도 있지요. 유달리 제가 '사숙'이란 단어가 마음에 잘 와닿던 것은 제가 그 책을 펴본 공간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책이 많은 공간에 들어가면 우선 마음이 놓입니다. 어색한 만남도 책이 있는 공간에서 마주하면 할 말이 많아져요. 그 공간에 멋진 뷰와 귀에 익은 곡까지 들리면..로맨틱한 만남이 되겠지요. 혼자 그 기분을 즐기기에 아쉬운 느낌마저 듭니다. 공간이지만 생명력이 있는 공간으로 제게 다가오면서 '이 공간을 만든 이는 누굴까' 궁금해집니다.
언젠가 북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여러 해를 거쳐가며 현실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계속해서 누군가를 초대해야 하는 공간을 꾸미기보다는 내 마음에 맞는 공간을 내 일상에서 만들어 가는 게 더 우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어진 시간에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지낼 수 있다면,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되어 피로도가 낮고 행복감은 지속됩니다. 이런 마음을 계속 이어오게 해주는 공간을 기획한 사람에게도 감사함을, 사숙의 마음을 바치게 되고요.
또 한 권의 책을 폈습니다. 책 제목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입니다. 30년간 아픈 나무들을 돌본 우종용 나무의사가 나무에게 바치는 '나무 예찬론'입니다.
"나무 의사이기 전에 나에게 새 생명을 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 게 바로 나무 아닌가.
누구는 육교 밑에서 인생을 배우고, 누구는 어린 아이들에게서 인생을 배운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중
문득 펴본 글귀에서 또 한 번의 사숙의 대상 '나무'를 만납니다. 그가 비유한대로 사숙의 대상은 다양합니다. 제 곁에 가까이에 있는 사숙할 분은 '책'이기에 제가 고르고 구매한 책들을 대출하는 '책 대여 공유서비스'를 레터 구독자분들 대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2017년 두 번에 걸쳐 초등학교 친구에게 장기간 책을 빌려준 대출 서비스를 진행한 적 있었어요. #나의사적인서재 라는 이름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에 관심 많았던 친구에게 10권을 빌려줬어요. 택배비는 착불로 지급했고요. 책의 대여기간은 3개월, 최대 6개월이었습니다.
당장 읽지 않은 책들을 전달해줘서 책장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친구는 이동이 어려운 지역에 사는지라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고르는 시간을 아끼게 되었고요. 근거리에 사는 친구가 아니다 보니 종종 보기 어려운 친구라 택배 속 손편지를 통해 안부와 취향을 공감하게 되어 친구관계는 더 돈독해졌답니다.
책을 빌려주는 책방이 요즘에는 있을지 모르겠네요. 중고등학교 때 즐겨갔던 도깨비 책방처럼, 비디오를 빌려주는 비디오 가게도 있었는데 말이죠. 회원 가입하면 일정한 대여비를 받았고, 늦게 반납하면 연체료가 있었지만 저는 그 친구에게 굳이 연체료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조건을 더 만들어야겠지만, 지난해 말 이사를 계기로 2020년~2021년에 구입한 그해에 신간 100여 권 이상을 대여해드릴 예정이에요.(1명당 5권 이하) 더 자세한 이야기는 3월에 공지드리겠습니다. 아래에는 그 서비스를 5년 전에 이용해본 친구의 후기입니다.
순천 내려오자마자 혜정이에게 빌렸던 책들. 주소가 아직 서울로 되어있어 도서관에서 책도 못 빌리고 친구도 없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됐었다. 혜정이의 '#더러운손_마음부자'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며 그녀의 시각과 지식에 참 감탄했었고 책장이 궁금했었다.
읽는 책들이 비슷한 분야에서 맴돌고 있고 아이가 생기니 자의든 타의든 육아서만 늘어나고 있어 뭐랄까. 분위기 전환이 전혀 되지않는 느낌. 계속 배터리 뚝뚝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고민하다가 혜정이에게 SOS를 쳤다. 쿨하게 책 목록을 보내줬으며 그중에 내가 마음에 드는 열권을 골랐다. 그렇게 받은 열권. 일부러 내용 안 찾아보고 제목으로 유추해서 궁금했던 분야, 내 상황에 도움되는 분야, 끌리는 책, 혜정이가 추천한 책으로 골랐다. 무엇보다 나에게 일, 직업, 나(자신), 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고 공고히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실 택배를 이용해 빌리는 서비스는 공공도서관 상호대차 서비스도 있고, 국민도서관을 통해 타인의 책을 빌릴 수도 있다.(내 책을 빌려줄 수도 있음) 이런저런 방법과 서비스들이 있겠지만 나는
혜정이의 꾸준한 #더러운손_마음부자 피드를 보고 그녀의 분야, 관심사, 책장이 궁금하여 요청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좀 참신하지 않나?
올해에는 모으지 말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소비하는 해로 정했어요. 시간이든 가지고 있는 물건이든, 결국 가지고 있는걸 제 타이밍에 활용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되더라고요.
가지지 않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가 소유한 물건의 쓰임을 찾는 것.
흰 노트에 기록들이 유의미하게 느껴지는 건, 그 기록들이 내가 새긴 나만의 것이기에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 쓰임을 제대로 활용하기 때문이겠지요. 저의 서재방에 있는 책들도 더 많은 분들이 빌려보며 책 안에 밑줄들과 손으로 쓴 후기들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제 일상의 가까이에 사숙이 된 '책'에서 구독자분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