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무게 EP.1

캐나다 워홀 도전기_24화

by 혜주

그날은 모든 게 늘어지는 날이었다. 샤워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지겨운 날이었다. 햇빛은 쐬야 했고, 기력은 없었다. 아이패드를 가방에 쑤셔 넣고, 헤드폰을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좋아하는 카페로 향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비즈니스호텔 1층에 있는 스타벅스,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로비와 어우러져 누구나 오래 앉을 수 있는 곳으로 투숙객들의 사용에 특화되어 있어 정말 푹신한 의자와 카페가 문을 닫아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올 때마다 앉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글을 써 내려가고 있을 때 로비 문이 열리며 대여섯 정도 되는 사람들이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수런거리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고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단번에 그를 발견했다. 오랜 비행을 했는지 구겨진 회색 정장 바지와 흰색 셔츠, 그리고 나와 마주친 눈. 그 동그랗고 사슴 같은 눈과 마주친 그 짧은 순간, 그는 내 것이라 느꼈다. 하지만 보기와 다르게 낯가림이 심해 곧 창피함을 느끼고는 모자를 더 푹 눌러쓰며 얼굴을 숨겼다.

'보지 말아야지. 보지 말아야지.'

침을 삼키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아무 말이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시간이 꽤 지난듯해 살짝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나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큰 테이블이 있는 자리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던 그는 모자를 눌러쓴 나를 보기 위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눈빛과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장난기 어렸던 웃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회의가 끝나자 나에게 슬며시 걸어왔고, 그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내 신경은 발가락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안녕. 반가워."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내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에어컨이 빵빵했지만, 알 수 없는 땀이 흘렀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 옆에 있는 기둥에 몸을 살짝 기대며 질문을 던졌다.

"뭐 하고 있어?"

"글 쓰고 있어."

"오? 어떤 글인지 궁금하다. 아직 일이 안 끝났는데, 퇴근 후에 만나서 들려줄래?"

그의 눈빛은 아이처럼 순수했다.

"좋아." 나는 매일 까먹는 번호를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그는 '좀 있다 보자'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꺼내며 실없이 웃었다. "전화해."


해가 저물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도 이 동네를 잘 몰라서 우리는 아까 처음 만났던 로비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나는 레드 와인을 한잔 했다.

첫 만남인데도 우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 여행했던 나라, 미래의 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것에 웃고, 별것 아닌 말에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그의 진지한 말투와 경험에서 묻어 나오는 시각은 나를 끌어당겼다.

그는 공군 헬기 파일럿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삶을 단단히 다져온 사람. 전쟁을 책과 영상으로만 접해온 내게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의 오른쪽 뺨, 왼쪽 눈썹에 있는 작은 거친 삶의 흔적과 순수한 눈빛, 회색빛이 살짝 도는 두터운 수염 사이로 드러나는 다정한 미소와 보조개는 눈을 깜빡이는 순간조차 아쉬울 만큼,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흔적 위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올렸다.

"언제 얻은 상처야?"

그는 놀라며, 내가 처음으로 그것을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자신이 겪었던 힘들었던 순간들, 흔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내 눈빛을 바라보는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본인을 오픈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우리가 연결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운명 같다고 말했다. 신이 본인에게 내려준 선물 같다고.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그 말이 낯설었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신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라고 질문했다.

그는 멀리 보이는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TV를 볼 때, 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를 볼 수 없지만, 전기가 흐른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오래 잔상에 남았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캐나다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나흘. 우리는 그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 마음을 확인했다. 그가 일하는 동안 나는 기다렸고, 내가 일할 때는 그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챙겨주었다. 맛있다고 생각한 것을 챙겨 와 잘라 투박하게 입에 넣어주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사온 온갖 종류의 음료와 커피, 내가 어떤 걸 고르는지 기대하는 표정 등 모든 게 나를 설레게 했다.

우리는 정말 쉬지 않고 대화를 했다. 종종 생각하지도 않고 쏟아내는 나를 발견했고, 이렇게까지 내려놓은 내 모습을 받아주고 있는 그에게 놀랐다.

작은 주제에도 우리는 몇 시간을 떠들 수 있었고,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단하고 확고했다. 가끔 융통성 없어 보이는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존경스럽고 멋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한국을 벗어나 캐나다로 온 것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예전과 다르게 기회가 많이 줄어든 캐나다에서 '얻어 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나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고민을 하는 그를 보며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 뭘 얻어가야 하나? 난 지금 좋아!"

내 단순한 대답에 그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젠간 네가 캐나다에 온 것에 대한 진짜 이유를 말해줄 거라 믿어."

별다른 생각 없다고 말하는 내가, 그의 눈에는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특정 인종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때는 그저 그가 너무 좋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 밤,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나는 워낙 잘 놀라는데, 날카로운 큰 소리에 특히 예민했다. 그 순간, 옆을 지나던 트럭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잘 놀라는 내가 겪어왔던 사람들의 반응은 늘 ‘그 정도로 놀랄 일이냐’며 타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놀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게 습관이 됐다. 그날도 놀랐지만 보통 사람들은 알아채지도 못했을 내 반응을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리에 민감하구나."

큰 반응하지 않고 무심하게 잡아준 손과 무심한 듯 다정한 한마디에 나는 한번 더 그에게 마음을 고스란히 던졌다.


식당 메뉴는 다양했고, 그는 낯선 음식 앞에서 조금 당황했다. 여러 나라를 다녔으니 도전을 즐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익숙한 걸 더 좋아했다. 아마도 보통 비즈니스를 위한 이동이었기에 그 나라를 가보고 투어를 하기는 했지만 이것저것 도전하고 새로움을 마주하는 진정한 여행을 겪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먹는 속도는 빨랐지만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접시에 얼굴을 파묻지도 않았고, 말이 지나치게 많지도, 지나치게 적지도 않았다. 그리고 햄버거를 정말 좋아했다. 그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그도 같은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 있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내가 움츠린 걸 보고 그는 외투를 벗어 내게 건넸다. 그의 향수냄새와 온기가 전해졌다. 그가 사는 나라는 겨울이 없을 텐데, 오히려 그가 더 추울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한참을 웃었다.

난 '그 정도는 아닌데.'라고 말하며 그에게 다시 외투를 건넸다. 그렇게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내일 아침에 떠나기 전에 만날 것을 이야기하며 헤어졌다. 나는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오래 바라봤고, 그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밤에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 감정을 받아들일지, 묻어둘지에 대한. 장거리에 대한 자신이 없었고, 4일로는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새벽같이 일어나는 그의 굿모닝 인사, 그리고 짐을 챙기고 있다는 문자에 나는 당장 그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과 신발을 갈아입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도착해 그를 만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남은 시간 동안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지 이야기했다. 그도 나도 이런 관계는 처음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아끼는 옷에 향수를 잔뜩 뿌려 내게 건넸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잊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예정된 비즈니스를 위해 다음 나라로 떠났다.


그 선물을 품에 안고, 나는 내 눈을 스스로 가렸다.

현실을 잠시 지우듯.

상처 좀 받으면 어때. 거짓말이었으면 어때.

나는 그렇게 내 마음에 온몸을 던져 빠져들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