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25화
그렇게 우리의 장거리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나와 시차가 9시간 정도 차이 나는 곳이라 내가 하루를 마무리할 무렵, 그는 새벽을 맞이했다. 현직 군인답게 굉장한 루틴을 가지고 있는 그의 하루는 며칠만 지켜봐도 단박에 파악이 될 정도로 단순했다.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해 퇴근 후 운동, 그 후엔 집을 가꾸고 어머니 집을 방문에 형제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그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영상통화를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과 사진을 주고받았다.
아쉬운 만큼 보고 싶은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더 커져갔고, 마음이 커져갈수록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모른다는 것에 대해 의심과 불안도 함께 증가했다.
그때의 나는 이곳에 조금씩 친구가 생기고 있을 때라 약속이 많이 잡히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노는 날도 있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모든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싶어 했고, 나도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친구들에게 역시나 잘 모르는 그를 소개하기란 참 쉽지 않았다. 다행히 친구들은 항상 반갑게 인사를 나눠주었고, 그는 통화 후에는 꼭 나에게 당부를 했다.
"10시 전에는 들어가."
순간, 마음속에서 계산이 시작됐다.
'퇴근하고 만나서 이미 7시. 약속 장소까지 오는 데만 한 시간 반. 이 모든 걸 알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 친구들을 옆에 두고 길 위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나 좀 더 늦을 것 같아. 들어갈 때 꼭 이야기해 줄게."라고 말했다.
그는 그 대답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새로 사귄 친구가 그와 인사를 나누는 것을 원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걸려온 그의 영상통화를 밖으로 나가 혼자 받았다. 친구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일찍 들어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원한다면 네가 했어야 해. 너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누가 나에게 중요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이건 서로 의사가 맞아야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할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그냥 카메라를 들이대. 그건 무례한 거지. 난 네가 말하는 게 이해가 안 가."
그는 '나의 행동이 너무 자유롭다고 이야기하며 이해할 수 없고, 이 관계를 시작해도 되는 게 맞는 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반대로 '우리가 뭔가 관계를 시작하기에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으며 그가 나를 너무 옭아매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첫 냉전을 겪었고, 결국 화해했지만,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감정에 눈이 먼 화해였다.
그 후로도 같은 싸움이 계속 반복되자 나는 결국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늦은 시간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대해 내려놓았다. 서로 하나씩 포기하자 이 싸움에 끝이 보였다. 행복했다. 드디어 뭔가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여느 다른 커플과 마찬가지고 사사로운 하루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마음과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가끔은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 연락이 제대로 되지 못한 날에는 꽤나 속상하기도 했다.
그는 강렬했던 첫 만남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운명'이라는 말을 많이 하며 나를 만나고 대화하며 아이처럼 변해가는 본인의 모습을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나 또한 첫 만남에서 발견한 그의 눈동자 속의 아이를 만나는 재미를 느꼈다. 그는 본인의 삶을 컨트롤하듯이 나의 삶도 컨트롤해주고 싶어 했다. 그는 나를 머스탱에 비유했다. 거칠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운전자가 통제하지 않으면 벗어나 버릴 수 있는 차, 하지만 제대로 몰면 누구보다 아름답게 달리는 존재. 하지만 그가 놓치고 있던 건, 나는 누군가에 의해 운전되어야 하는 차가 아니라, 운전대를 쥔 사람이었다.
그는 본인이 그 차를 운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나라는 머스탱을 멋지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나 캐나다에서의 내 삶에 필요한 부분이 없는지에 대해 물었고, 나에게 고민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생각보다 별 고민 없이 살고 있는 나였기에 난 언제나 '필요한 거 없어. 고민 없어. 괜찮아.' 등의 말들을 했고, 그는 그런 내가 나를 잘 드러내지 않고 본인에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나는 마음이 놓이는 사람에게만 내 이야기를 했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직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내 무의식적 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같은 과일을 좋아했다. 그는 집 마당에 '우리의 과일나무'를 심었다. 아침마다 그 나무에 물을 주며, 커다랗고 두터운 손으로 콩알만 한 과일을 살며시 들어 보였다. 그게 어찌나 웃기고 귀엽던지.
그와 나는 서로의 생활 곳곳을 보여주었다. 집 안의 모습, 출근하는 길, 그리고 사실 우리는 둘 다 핸드폰이 금지된 곳에서 일했지만, 일하는 공간을 조금씩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공간을 보면서 그가 왜 내 자유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유를 즐기되 그 안의 질서를 믿는 사람이었고, 그는 질서를 사랑하되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질서를 세워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익숙해졌고 섞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은 아니었지만 그는 중립국의 군인으로서, 그리고 꽤 높은 직급으로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연락이 쉽지 않았고, 전쟁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껴본 적 없는 나에게는 그의 상황은 짐작조차 어려웠다.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단어 하나로 표현되지 않는 두려움이 되었다. 나는 하루 종일 뉴스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상황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면서. 그는 핸드폰을 몰래 들고 들어가 하루에 한두 번은 나의 안부를 물었고, 그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한 번은, 그가 갑자기 장문의 문자를 보냈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매번 오늘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해.
내가 죽으면 네가 혼자 남겨질 테니까.
이 일이 처음으로 너무 싫어졌어."
얼마나 많은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그가 이 문자를 보냈을까. 그의 말속에서 나의 존재가 얼마나 깊이 자리했는지를 느끼면서도, 그 문장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가 매일 보내오는 '살아있다'는 메시지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관계의 미래에 같은 일이 또 닥친다면, 내가 혼자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그 와중에도 나에게 집착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싶어 했고,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반바지, 반팔 티셔츠임에도 불구하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바지라서 싫어했고, 티셔츠는 너무 달라붙는다고 싫어했다. 한여름이라 너무 더워서 나시라도 입은 날엔 갑자기 급발진하듯 화를 냈다. "다른 사람들과 널 공유하기 싫어."
그는 또, 자신이 연락할 수 없을 때에도 내가 영상이나 문자를 남겨주길 바랐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나의 하루를 세세히 보고 싶어 했다. 나는 그 모든 게 참 힘들었다. 꾸미지도 않는 사람인데, 옷차림 하나로 계속 싸움이 나는 것도 지쳐갔고,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에게 혼자 말을 남기는 일도 버거웠다. 그는 내가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나의 이 복잡한 마음을 오해 없이 설명하기에는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싸우고 걱정하고를 반복하며 많이 울고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몇 주를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이틀, 삼일쯤 지났을 까. 그가 연락이 왔다.
"이 전쟁에서 나와 함께 하던 동료를 잃었어. 그래서 몸과 마음이 아팠고, 장례식에 다녀와야 했어."
죽음.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는 건가.
그의 말 한 줄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언제, 어디서,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감정은 사랑보다 훨씬 더 묵직했고, 관계 전체를 덮는 불안으로 번져갔다. 하지만 그는 함께 이 시간을 견뎌 낸 나에게 더욱더 깊은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느끼는 이 혼란과 두려움을 끝내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곧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또 그렇게 평범한 연인으로.
하지만 그 평범함은 잠시였다.
그의 사랑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 사랑이 점점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