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26화
요즘 내 루틴 중에 하나는 YMCA에 가는 일이다. 그곳에는 일반과 VIP 이렇게 두 개의 멤버십이 있는데, 이 둘은 가격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지만 샤워실이 다르고 탈의실에서 제공되는 것들이 다르다. 나는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데다가 애초에 일반도 가벼운 금액이 아니기에 일반 멤버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일반 멤버십 샤워실 근처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안내가 없어 평소와 같이 탈의실로 입장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도, 옷을 벗을 수도, 그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 넓은 탈의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자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보이는 건 평소와 똑같이 사용하고 있는 아주머니들. 그들은 훌러덩훌러덩 옷을 벗어던진 후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직도 들리는 남자들의 목소리와 아주머니들의 행동에 걱정되는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이었다.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머니, 여기 남자들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데요?! 제가 여기 다 돌아다녔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도 조심하셔야 될 것 같아요.”
내 걱정 어린 표정과 말에 아주머니들은 크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여기 샤워실 공사해. 너도 이야기 못 들었구나? 안내판 세우라고 이야기했는데 아직 안 세워졌어.”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일반 멤버십 샤워실 안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VIP 샤워실을 사용하라고 알려주셨다.
순간, 내가 만약 남자들 목소리를 못 들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발가벗고 신나게 일반 멤버십 샤워실에 갔다면 벌어졌을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서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아주머니들에게 속사포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린 후, 샤워실 안쪽으로 들어가니 파란색 천으로 살짝 가려놓고 그 너머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안내도 안된 이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더 이상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최대한 샤워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VIP 샤워실 쪽으로 이동했다.
처음 사용해 본 VIP 샤워실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일반은 샴푸, 바디워시가 통합된 제품을 하나 비치해 주었지만, VIP는 샴푸, 린스, 바디워시 따로 놓여있고, 심지어 두 개의 다른 사우나와 온수 풀이 있었다.
또, 일반은 드라이어가 벽에 붙어있는 형태인데, VIP는 드라이어가 탈의실에 비치된 테이블 앞에 각각 있었다. 그리고 꽤 두툼한 수건도 제공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차이가 많이 나는 이 공간을 돌아보며 ‘VIP가 좋기는 좋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 본 만큼 안다고 하나 보다.
그렇게 며칠을 사용했다.
공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파란 천은 샤워실 입구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전에는 멀리서 들리던 남자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내 바로 귀에다 때리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들렸다. 아무리 천으로 가려져 있고 서로 볼 수 없더라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만으로 옷을 갈아입기 불편함을 느꼈다.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아 VIP 탈의실을 쓰기로 했다. 수영을 마치고 샤워 후 테이블에 비치된 드라이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확인하는 순간, 한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여기는 핸드폰 사용이 금지야.”
“전화가 와서 잠깐 확인했어.”
“그래도 나가서 확인해야 해.”
“응, 알겠어. 놀랐다면 미안해. 근데 전화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전화가 와서 1초 확인한 것뿐이야. “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복도로 향하더니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누군가를 열심히 부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머니 행동에 짜증이 났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얼른 하고 나가자'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한 직원이 다짜고짜 다가와 그 흔한 인사도, 소개도 없이 물었다.
“멤버십 카드 있어?”
순간 화가 올라왔다.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겠지?”
“멤버십 카드 보여줘.”
내가 건넨 멤버십 카드를 그 직원은 말없이 낚아채더니,
“확인하고 돌아올게.”
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라졌다.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고,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프런트로 향했다.
프런트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찾아왔다.
“어딨 는 지 한참 찾았어. “
"네가 한 행동에 기분 나빠서 나 여기 duty manager 만나야겠어.”
“아냐 아냐, 왜 기분이 나빴어.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멤버십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어. “
“근데 왜 나만 검사해?
그리고 나한테 이유 한 마디 없이 그냥 멤버십 카드 낚아채서 확인하러 간다고 했잖아.
그거 되게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나 여기 맨날 같은 시간에 오는데 지금 너 처음 봐.
그런 지시를 받았다면 왜 여태 난 검사받은 적 없고 본 적도 없지? “
그녀는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과장된 다정함을 표현하며 말했다.
“Beautiful, My dear, 너 오해하는 거야. 네가 기분 나빴으면 내가 사과할게.
근데 너는 일반 멤버십이라 VIP 샤워실만 사용해야 하고, 탈의실은 사용하면 안 돼. “
“나 너 dear 아니야.
일반 멤버십 탈의실 바로 옆에서 남자들 목소리가 들려와서 굉장히 불편한데 내가 이용해야 돼?
그리고 너네 안내도 제대로 안 해놓았잖아.
네가 말하는 그 규칙 안내 어디 적혀있는데?”
그녀는 내 말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기분 나빴으면 정말 미안해. 네가 불편하면 탈의실 사용해도 돼. 네가 오해하는 거야.”
여전히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들이 변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이모뻘 정도는 될 것 같은 직원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후 자리를 떴다.
“여전히 기분 나쁘고, 네가 하는 말 앞뒤가 안 맞지만,
더 이상 내 기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만 말할게.
앞으로는 조심해 줘.”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Tims에 들러 아이스캡 하나, 사촌동생을 위한 작은 도넛 세트 하나를 샀다.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신나게 친구들이랑 소리 지르며 게임을 하고 있는 사촌동생을 보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동생방에 작은 도넛 세트를 밀어 넣어주고 얼마나 신났는지 느낄 수 있는 동생의 신난 소리에 소리를 들으며 에너지를 회복했다. 그리고 저녁에 동생과 함께 밥을 먹으려고 준비하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거 완전 차별이야. 언니, 아시안이고 동안이라 어려 보여서 그런 거야.”
동생의 말투는 단호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포인트였기에 ‘그래서였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동생은 본인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당했던 아시안, 어린, 여자 이 세 가지 때문에 겪었던 인종차별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에 하나는 정말 최근의 일이었는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과학 선생님은 백인 젊은 여자였다. 동생과 그녀의 베프는 아시안인데, 선생님은 그 둘이 함께 자리에 앉거나 또는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을 싫어했고, 심지어는 앞줄에 앉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동생과 베프에게 자리를 멀리 띄어 앉게 만들었고 뒤쪽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반대로 백인 여자애 둘에게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앉거나 앞줄에 앉아 떠들 때도 선생님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쪽지시험을 보았는데, 백인 여자애가 쓴 답과 동생이 쓴 답이 똑같은데, 동생에게는 마이어스 점수를, 백인 여자애에게는 온전한 점수를 주었다. 동생이 점수에 대해 물었지만, 선생님은 질문 자체에 짜증을 냈다.
그래서 동생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시안이라서 그런 거예요?
지금 인종차별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은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점수는 곧 고쳐졌다.
동생은 내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언니 뭔가 불공평하면 제일 먼저 물어봐.
너 내가 아시안이고 어리고, 여자라서 그러는 거냐고.”
그 말이 참 씁쓸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단단함에 웃음이 났다.
이제 겨우 열여섯,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했던가. 어떤 상처를 받았고, 어떻게 이겨내었던가.
이 아이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이렇게 싸워왔을까.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결국 그것마저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구나.
내가 살아왔던 세상은, 정말 작고 작은 세상이었구나.
YMCA에서 겪었던 일이 과연 인종차별과 관련이 있는지는 사실 확신 할 수 없고,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생과 이야기하며 생각했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겪게 될 일이고, 겪어 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한국에 살 때는 언제나 ‘좋은 게 좋은 거지. 화내면 뭐 해. 따지면 뭐 해. 그냥 좋게 잘 넘어가자.’라는 마인드로 살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점점 더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무례하다고 느끼면 따져야 하고, 차별이라고 느낀다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새로운 형태의 분노를 만나고 배우는 중이다. 가끔 스스로 싸움닭이 된 것 같지만,
사촌 동생처럼 언젠가 이 분노도 멋지게 컨트롤할 수 있는 때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