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27화
토론토의 여름은 늘 축제와 이벤트로 가득하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할 것 같지만, 막상 가보면 생각보다 잔잔하고 도란도란하다. 한국보다 강렬한 햇빛과 조금 덜 찝찝한 습도 속에서,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다람쥐들과 불어오는 바람이 하루를 더디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들에게 연락이 왔다.
“혜주야, 공원에서 영화 보러 갈래?”
”무조건, 예스지. “
언니들이 말한 공원에서 영화를 보는 이벤트는 Toronto Outdoor Picture Show였다. 여름 내내 토론토의 여러 공원에서 진행되는 야외 영화 상영 행사다. 열리는 모든 공원이 우리 집에서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공원에서 영화 보기’라는 말의 낭만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하나 있었다. 술.
낭만에 술이 빠질 수 없는 우리에게는 갈 수 있는 공원이 약간 한정적이기는 했다. 캐나다는 공공장소 음주가 불법이라 정해진 구역 외에서는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주가 가능한 공원을 찾아야 했고, 결국 Christie Pits Park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미리 근처에서 만나 각종 음식과 와인, 맥주를 구매했다. 날씨가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오늘이었다.
공원에 도착하니 많은 가족들, 커플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돗자리 대신에 담요를 많이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방수가 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젖기도 해서 담요를 두세 개씩 겹쳐 사용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접이식 의자를 들고 온 사람들, 맥주를 짝으로 가져온 아저씨들, 강아지와 함께 나온 친구들 등등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생각보다 설치된 스크린이 크지 않아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우리 주변에 가득가득 다닥다닥 사람들이 붙어 앉아 놀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근처의 작은 부스에서 팝콘을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까 무료로 사람들이 받아가는 것 같았다. 언니들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속삭였다.
“저게 뭐지? 뭐야. 누가 가서 물어봐 봐.”
우리 중에 막내가 쓱 일어나 “제가 다녀올게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 돌아온 막내가 말했다.
"이름을 적고 투표함에 넣으면 팝콘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추첨을 통해 VIP자리에 앉을 수 있대요!"
스크린 앞에 보니 제일 좋은 자리에 아주 커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빈백이 준비되어 있었다.
맛있는 와인과 맥주, 음식으로는 족발, 떡볶이, 피자 등을 먹으면서 올려다본 하늘은 참 맑고 깨끗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고, 살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조금씩 움직이는 구름을 보는데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꼈다. 한참을 떠들고 놀다 보니, 저 멀리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니 아까 팝콘 나눠주는 곳에서 본 투표함을 들고 사회자가 나타났다. 사회자는 곧 영화가 시작할 것을 알리며, 투표함에 손을 넣어 종이 하나를 꺼내 읽었다. 한 백인 가족이 뽑혔다. 아버지는 아들을 커다란 빈백에 앉혔고, 조그마한 아들은 거의 빈백에 묻히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유명한 가족영화인 ‘School of Rock‘이었다. 마음을 먹고 이 영화를 찾아본 적은 없지만, 비행기를 탈 때마다 멍 때리고 즐겨보던 영화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거라 그런지 반갑기도 하고 좋았다. 다만 문제는 자막도 없는 영어로 진행되는 거라, 집중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 내가 뭘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충분히 낭만적이고 즐거웠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그런가 점점 습도가 올라오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취기가 오르고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나는 결국 드러누워 반쯤 감긴 눈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함께 왔던 언니들 중 한 명은 이미 저 멀리 벤치에 가서 앉아있었다.
돗자리 위에 남아 누워있던 우리는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슬슬 일어나 볼까?‘
다들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명당을 차지했지만, 뒷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지금 떠나면 더 완벽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은 음식과 술을 챙기고 돗자리 끝을 손에 꼭 쥔 채 몸을 최대한 숙여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름이라 더운 줄 알았던 공기는 그저 사람들이 빽빽하게 차있었기에 더웠던 것이었고, 막상 그곳을 빠져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오늘의 분위기와 낭만은 충분했다.
우리는 근처 맥도널드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하고 동네를 걸었다.
여름의 밤은 그렇게 천천히, 또 한 번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