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는 사랑입니다
아이가 잠들고 난 뒤 찾아온 밤은 길고도 짧다. ‘얼른 재우고 빨리 내가 숨 쉴 나만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야지’ 하고 다짐했던 ‘to do list’를 해내기엔 이미 나의 몸과 마음이 거실 바닥에 맥없이 널브러져 있다. 못 다 읽은 책도 보고, 음악 좀 들으면서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노트에 필사도 좀 하고, 이도 저도 싫으면 그저 멍한 채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시원한 맥주 한 캔 톡! 따서 미뤄둔 미드나 영화 한 편 볼까 싶어 머릿속으로 바쁘게 궁리를 해 보지만 몸이 영 따라나서 주지를 않는다. 둘째 꼬망을 낳고 나서 체력 방전을 실감하며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려보기로 한다. 무(無)의 공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고 싶은 자의 게으름.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 없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태의 늪으로 쑥 꺼질 것만 같다. 결국 두려움에 지고 마는 나. 시간아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더디게 흘러가 줬으면. 깊은 밤 몽상을 뚝뚝 흘리고 있는 시간만이 정신을 붙들어 줄 묘약. 그만큼 내겐 종합 비타민, 보약으로도 해결 못할 값어치의 시간이다.
소파에 힘없이 축 걸쳐진 유약한 몸이 말없이 눈을 감는다. 지금 이 게으름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는 욕망밖에 다른 생각이 나질 않는다. 맞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려놓은 축 늘어뜨린 시계처럼, 지금 주어진 시간만큼 만이라도 영원히 이어지길. 잠이 곧 꿈이 되더라도, 꿈속에서 조금만 더 꿈을 붙들어두면 좋겠다.
빠 줘- 음마, 빠~
꿈일 거야. 꿈. 조금만 5분만, 10분만 더. 새벽녘 찬 공기가 느껴져 온 몸에 휘말았던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며 꿈속을 더 헤매려 하는 나. 다시 한번 들리는 소리.
빠 줘... 빠...
아, 아침이다. 꼬망이 아침을, 잠든 나를, 꿈에서 헤매는 나를 깨우는 소리. 오늘따라 새벽같이 일어난 아이가 밥 달라고, 어서 밥상을 대령해달라는 단 두 마디의 말로 얕은 렘수면의 경계면을 톡톡 깨뜨린다. 달콤했던 짧은 밤은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열렸다. 피곤에 푹 절어 있는 몸을 일으켜 잠을 깨고 기지개를 활짝 켜야 할 때. 굼뜬 걸음으로 한발 한발 냉장고 문 앞으로 다가서는 동안 아직 졸린 뇌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뭐 먹지? 문득 잘 차려진 밥상을 떠올린다. 아니, 밥상이 차려지기 전까지 새벽을 깨워 쌀을 씻고 밥을 짓고, 송송송 무를 썰어 국을 끓이고, 부지런히 만들어 둔 밑반찬을 꺼내어 식구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친정 엄마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엄마도 그러했겠지. 삼시 세끼 무엇을 먹을지 궁리하고, 먹고 치우면 또다시 당도할 끼니 차림에 대해 매번 같은 고민했을 것이다. 엄마는 뭐가 되었더라도 가족들 아침밥은 꼭 챙겼다. 아침뿐 아니라 엄마의 손은 크고 빨라서 뭐든 척척 해내어 늘 손수 지은 집밥을 차렸다. 바쁜 가게 일을 하면서도 때맞춰 김장김치는 물론, 열무김치와 깻잎김치, 총각김치와 깍두기, 동치미까지 갖가지 종류의 김치를 담갔다.
늦봄에는 시장에서 무른 딸기를 사 와 꼭 잼을 만들어 쟁여놓고, 여름이면 서리태 콩물을 직접 내려 콩국수를 준비했다. 가을엔 엄마표 꽃게탕 앞에서 삼 남매는 달달한 꽃게 살을 전투적으로 발라 먹고 국에다 밥을 훌훌 말아먹었다. 겨울엔 토실하게 탱탱하게 차오른 꼬막과 그 위에 올린 짭조름하니 간이 딱 맞는 간장 양념, 두말할 나위 없이 밥도둑이다. 엄마가 뚝딱 차려낸 밥상엔 늘 아삭한 김치는 물론 나물 한 두 가지가 꼭 자리를 지켰다. 엄마의 밥상 사전엔 가공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내가 맛보던 가공식은 도시락 반찬으로 가끔 먹은 햄과 소시지볶음, 참치가 전부였던 것 같다. 반찬 중 열에 아홉은 거의 요즘 말로 건강식이었다.
그 덕이었을까. 전형적인 소음인, 마른 체질의 내가 2009년 신종플루가 들이닥쳤을 당시 회사에서 독감에 걸리지 않고 유일하게 버텨낼 수 있던 건 다 엄마의 정성 어린 손맛이 지어낸 집밥의 내공.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윤과 꼬망, 둘 다 하필이면 살집이 없고 깡마른 내 체질을 닮아서 늘 걱정이다. 영유아 검진을 받을 때마다 몸무게가 평균은커녕 상위 5~10%에 머물러서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밤잠 설치는 일도 많았다. 각자의 성장 속도대로 잘 먹고 잘 크고 있지만 여전히 또래들에 비해 왜소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의 무기는 친정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또박또박 복기하는 것에서 다시 시작한다. 건강식 집밥. 엄마 손맛까지는 절대 모방 불가한 영역이지만, 내 나름의 손맛으로 최대한 엄마 흉내를 내어보는 것. 그게 현재로선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이다. 그나저나, 그래서, 뭐 먹지? 다행이다. 미역국이 아직 많이 있어서. 반찬은 멸치랑 김, 노른자 터뜨린 계란 프라이. 별 거 없는 그런 아침밥이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나요.(라고 옆구리 쿡 찔러보기)
단 한 번, 네버랜드
소소하고 사사롭게
너의 말이 다가온 날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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