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Ending Story
돌이켜보니 <단 한 번, 네버랜드>의 첫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부모님의 맞벌이 생활로 다섯 살 어린아이였던 저는 친가가 있는 고창 시골집에 맡겨져 할머니와 큰아빠, 큰엄마와 지낸 적이 있어요.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시골에서의 어느 깊은 밤, 어린 제가 할머니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함미 함미~ (할머니 할머니)
우유 쪼끔만, 우유 쪼끔만...
그렇게 할머니 곁에서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조르고 조르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지요. 초등학교 우유 급식 시간에 담임 선생님 잔소리로 우유를 마시기 전에 꼭꼭 씹어먹었건 기억은 나지만 사실 저는 우유를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못하는 아이였어요. 장이 약해서 우유를 먹고 나서는 꼭 배가 싸르르 아팠던 기억이 더 많거든요. 그 어린 날의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면 시골집 냉장고에 신선한 우유가 있었을리 만무하고요. 왜, 우유가 먹고 싶었는지도 여전히 의문이에요. ^^
친정 엄마는 그때 그 일이 내내 가슴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그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주 조금 헤아려집니다. 어린 딸을 시골에 멀리 두고 와 당신 품에서 보듬지 못했던 그 밤이 어떠했을지 말이지요.
어린 딸의 말 한마디로 부모님은 지난날, 그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말 한마디로 인해 그날의 기억과 온기와 감정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 기억에서 복구하지 못하는 못한 제 어린 날들의 ‘말’들이 못내 아쉽다는 것을요.
소소하고 사사로운 글 <단 한 번, 네버랜드>의 그 모든 ‘첫’ 영감이 되어준 큰 아이는 지금 아홉 살입니다. 말소리를 뱉는 것 마저 감탄해 마지않던 ‘아기아기한(아기다운)’ 말들은 훌쩍 줄어들었어요. 그 시절의 어린 감성은 휴대전화 속 동영상과 사진, 그리고 제 기억의 섬을 오고 가는 ‘치치코코’ 소리로 남았습니다. 아이는 또래와 어른의 말, 책과 미디어 등 자신의 눈으로 만나는 세상 속 다양한 안테나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무한 흡수하면서도 자기만의 견고한 자아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마블 시리즈 슈퍼 히어로의 대사 한마디에 열광하고, 엄마인 저보다 영웅 캐릭터의 서사를 줄줄 꿰고요. 학교 앞 문구점 뽑기가 세상 제일 궁금하고 설레는 일이지요. 손흥민 선수를 꼭 만나고 싶어서 영국에 가보는 게 제일 큰 꿈이자 희망사항인 어린이로 폭풍 성장하고 있는 중이에요. 쑥쑥 잘 크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조금 천천히 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교차해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엄마 관찰자, 수집가 시점에서 바라본 저의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 와중에 툭 하고 떨어지는 아홉 살 감성은 얼마나 귀하고 빛나던지요.
불빛이 꼭 피아노를 치는 것 같아.
도심 속 야경을 구경하러 드라이브를 나온 봄 밤, 강물에 비친 다리 위 가로등 불빛을 보더니 아이가 말하더군요. 마침 강물 위로 흐느적거리는 색색의 고운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저의 마음을 대변하듯 말이지요. 그 예쁜 말 한 톨 담아두지 않으면 사라질까 봐 그날도 저는 조용히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요히 아홉 살의 언어를 들어주는 것과 기록하는 것 그게 전부니까요. 아마도 한강에 밤 산책을 나올 때마다, 총천연색 조명 빛이 스민 강물을 마주 볼 때마다 아홉 살 아이의 그 말이 떠오를 거예요. 다섯 살 꼬망, 둘째의 사랑스럽고도 엉뚱한 말들은 여전히 저의 일상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소소하고 사사로운’ 에피소드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아직은 형보다 어리기에(!) 반짝이는 ‘치치코코’들이 더 달릴 날이 유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러했어요.
나 다시 작아질래.
응? 나 언제 다시 작아져? 저거 다 내 꺼란 말이야! (놀러 온 동생에게 장난감을 못내 양보하며, 눈물범벅이 된 채로) * 구름이 하얀 파도 같아요. (흰 구름 길쭉하게 늘어진 아침 하늘을 보다가) * 그늘이다. 회색 그늘! - 응. 나무가 그늘을 만들었네. 해삐치를(햇빛을) 가려주는 거야? - 그렇지. 그래서 그늘 아래는 시원해. 히잉. 그럼 나무는 뜨겁겠다. (어린이집 가는 길, 나무 그림자를 보다가)
지금도 꼬망의 어록과 에피소드는 차고 넘칩니다. 아직은 여리고 여린 순수한 아이라서 직관적으로 할 수 있는 말, 어른은 도저히 생각하려 해도 꾸미려 해도 할 수 없는 말들은 이상하게 제 마음을 건드리곤 합니다. 왜일까요. 왜 저는 이토록 소소하고 사사로운 말들을 모으게 되었을까요. 돌이켜보면 이름표도, 소속도 없는 엄마의 일상은 그리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존재감 제로의, 아무것도 아닌, 텅 빈 자아를 마주할 때마다 그 일상을 일구어내는 자신이 티끌처럼 작아지곤 했습니다. 감사하고 고맙고 소중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들은 때론 목소리를 높여가곤 하지요. 뭔가를 더 바라고 희망하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욕심이라고, 아이를 잘 키우고 엄마 역할을 잘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엄마가 아닌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까지 ‘엄마’라는 옷을 입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일을 그만두고 쉬던 자아가 수시로 욱하고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간 잊고 있던, 성장하지 못하고 내내 정체기에 머물렀던 자아의 꿈이었을까요. 잘 해소되지 않는 감정과 이런 불만들이 엄마 역할을 수행할 때 뒤섞이면 그땐 저도 이성을 잃고 감정만을 호소하는 불곰 엄마로 돌변하곤 합니다. 균형감을 잃어버린 상태로 무너져 버리는 것이지요.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켜켜이 쌓인 마음의 부스러기들을 글로 기록하고 나면 복잡하고 시끄럽던 내면이 한층 고요해지고 맑아졌습니다. 말하자면 일상에 보이지 않는 여과기를 하나 단 셈이에요. 일기 같은 사소한 글이지만 마음속의 말들을 비우면 오히려 텅 빈 자아가 뭔지 모르게 조금씩 차오르는 느낌이 들어요. 그 무렵 아이의 말소리가 큰 울림으로 다가와 틈틈이, 짬짬이 아이가 남긴 말들을 글로 스케치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아이의 언어를 빌려 붙잡아두고 싶은 제 삶의 장면을 글로 기록한 늘임표의 순간들. 그 소소하고 사사로운 기억에 좀 더 의미를 새겨두고픈 저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치코코’ 소리를 내며 말을 건네 준 나의 사랑이들, 반짝이는 어록을 쏟아낸 원저작자인 두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부터 먼저 해야겠네요.
아직은 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네버랜드로 향하는 문은 계속 열어두려 합니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또 반짝이는 말들이 언제 툭 하고 떨어질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