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대한 단상II. 양수를 기억하다 (1편)
하늘은 무얼 망설이는 걸까. 며칠 째 햇살 한 줄기 없는 하늘색은 짙은 회색 물감에 흰색을 섞어 풀어놓은 듯, 꽤 밝은 무채색의 톤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이 감돈다. 축축한 공기를 타고 나뭇잎과 흙은 온 가슴을 열어 내보이며 숲과 흙 내음을 솔솔 풍긴다.
때는 장마. 비구름이 왔다가도 다시 흩어지는 날들이 며칠째 거듭 되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창밖을 내다본 아이가 현관 구석에 있던 우산을 들었다 내려놨다 하다가 펴달라며 내게 달려온다. 우르르 쾅쾅! 우르르...
천둥 번개 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 며칠간 애를 태우던 하늘이 드디어 날을 잡았다는 듯, 한바탕 거하게 쏟아질 것만 같다.
저 멀고 먼 구름에서 출발한 투명한 물줄기의 수직 낙하. 지표면에 닿는 즉시 빗물의 느낌표 합주가 시작된 다. 베란다 창 밖에 내리긋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빗소리의 공명도 짙어지는 비요일 오후.
와! 무이다! 무! 엄마, 무!! 무울!!
하루 종일 어둑어둑하더니 이제 비가 오네.
비 -무울. 우잔(우산)
내가, 내가 들고 갈 거야.
눈이 똥그래진 아이가 신발장 문을 열고 노란 장화를 꺼내 든다. 비가 오니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빗물 놀이를 하러 가자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빗물을 좋아하던 너. 물로 빚어진 투명한 느낌표가 손끝에 톡톡 떨어지는 그 느낌을 좋아하던 너지. 비단 빗물 뿐이겠어. 눈물샘 길이 막혀 눈곱이 끼고 결막염이 걸려도 좋다고 분수대 물도 가리지 않고 노는 너인걸.
온몸에 축축하고 습한 기운이 들어차는 긴 장마 속 어느 한 지점에서 빗소리가 좋다고 설레어하는 아이를 볼 때면 딱히 이유도 없이 그날이 떠오른다. 내 몸속에 남아있던 양수가 아이를 마지막까지 보호해 주던 그 순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의 첫울음을 듣던 찰나, 그리고 그 뒤의 불안한 시간들, 돌을 맞기까지 노심초사했던 길고 긴 낮과 밤의 시간들.
출산 예정일을 3일 앞둔 토요일 저녁, 어쩌면 출산 전 주말권 마지막 만찬이 될지 모르겠으니 고기라도 먹고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남편과 삼겹살 구이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만삭의 배가 더욱더 불룩해진 상태라 최대한 천천히 거닐고 있던 중에 다리 밑으로 따뜻한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물은 나의 의지로는 멈출 수 없이 흘러나와 입고 입던 레깅스를 흠뻑 적셨다.
양수! 아! 양수가 터진 거구나! 아침에 비친 옅은 선홍빛 이슬을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겼는데, 올 것이 왔구나. 그 날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닥치는 대로 수건을 서너 장 챙겨 들었다. 남편은 미리 준비해 둔 출산 가방을 들고서 택시를 잡으러 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 휘 둘러보는데 시야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개수대에 있는 수박 껍질. 한동안 집이 비어 있을 테니 처리는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과일 껍질을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현관문을 닫았다. 난 남편이 잡아 놓은 택시에 올라 타 수건 서너 장을 깔고서 자리를 잡았다. 몸은 잔뜩 긴장해 심장이 쿵쾅 요동치고 있었지만, 정신 줄은 놓지 말자며 거듭 다짐했다. 출발지는 도곡동, 도착지는 신촌에 위치한 종합병원.
(2편이 이어집니다)
단 한 번, 네버랜드
소소하고 사사롭게
너의 말이 다가온 날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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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를 기억하다 #초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