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대한 단상 I. 바다를 만난 꼬마
세 식구의 공식적인 첫 여행은 꽤나 즉흥적이었다. 첫 돌이 지난 뒤 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 우리 부부는 아이와 함께 무작정 떠났다. 바다로.
나름 첫 장거리 여행인데 챙긴 거라곤 물병과 기저귀, 물티슈가 전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이 동반 여행치 곤 참으로 단출한 가방이다.
가까운 친정을 가는 데도 최소 1박 2 일의 짐을 꾸려야 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파우치 수준. 과감하게 일을 저지를 수 있던 건 아이가 이유식을 떼고 어른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상 가능한 비상시의 준비물이 한데 들어있는 ‘기저귀 가방’도 이제 안녕이란 뜻이다. (여기서 ‘기저귀’는 상징적 의미. 기저귀만 넣는 게 아니다. 물병, 기저귀, 물티슈, 이유식기, 보습제, 손수건, 여벌 옷, 그 외 휴대 가능한 아기 용품과 나의 소지품 등 가급적 다양하고 많이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가방이다) 세 식구의 첫 장거리 여행은 그렇게 미련 없이 산뜻한 가벼움을 안고 시동을 걸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깊은 어둠의 밤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분주하게 저녁 손님을 맞는 횟집 가게를 등지고 세 식구의 눈앞에 밤바다가 펼쳐졌다. 아이 눈에 들어온 첫 바다의 풍경은 캄캄한 밤, 이따금 들이치는 파도소리, 그리고 너른 모래밭.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살며시 모래사장 위로 내려주었다.
바다야 바다~
우리가 바다에 온 거야.
......
(아이는 곰곰이 바라본다)
“무이야 무울, 무울......”
아 무울이라고~ 그렇지...
엄청 크고 많은 물이지.
작고 둥그스름한 형상의 모래 언덕에 빛과 그림자가 스며들어 굽이굽이 올록볼록한 모래밭. 아이가 발을 내밀자 모래 속으로 부드럽게 쑤욱 들어간다. 아이는 자기 발이 들어간 자리를 골똘히 바라본다. 그러더니 다른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모래 속으로 움푹 들어갔던 발이 ‘스윽’하고 빠져나온다. 그렇게 천천히 몇 번을 거듭했을까. 몇 걸음 걸어가다 ‘다다다다’ 달려본다.
발이 푹푹 빠지는 드넓은 모래밭 끝, 파도소리가 제법 가까 이 닿는 지점에서 아이가 멈추었다. 아빠 손을 잡고 쪼그려 앉아 파도가 실어 내린 하얀 물거품을 본다. 더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아이의 본능을 감지한 순간, 오늘은 거기까지. 난 아이의 마음에 급제동을 걸었다. 곧 아침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이를 달래며 세 식구의 첫 바다 밤마실의 막을 내렸다.
이튿날, 온 우주의 약속대로 태양은 떠오르고. 아이는 아침 바다를 마주했다. 깜깜한 밤은 물러가고 하늘을 가득 메운 하얀 빛을 배경으로 어제의 모래밭에 섰다. 신발과 양말을 벗은 채로. 뽀얀 발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간질인다. 전날 밤보다 더 과감하게 ‘다다다다’ 내달리는 녀석.
넘실대는 파도가 남긴 물거품이 모래 속으로 쏘옥 스며들자 아이가 발을 슬쩍 갖다 댄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앗!’ 차가움도 잠시, 발등 위로 찰랑거리는 파도를 밟으며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그러다 바닷물이 스며든 모래 면과 촉촉한 발바닥이 맞닿는 순간, ‘착!’하고 찰지게 감기는 소리에 아이가 눈을 번쩍 뜬다. 어제 급제동을 걸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말았다. 아침 바다에서 아이와 파도가 만들어가는 ‘물꽃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파도야 놀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모래밭에 앉아 눈을 감고서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듣던 아이. 바닷물이 저 멀리 밀려나갔다가 파도와 함께 들이친다. 손을 쭉 뻗고 발 끝을 세워 총총 다가가 첨벙! 바닷물에 뛰어들던 아이. 종이를 가득 채운 푸른 파도의 질감과 촉감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작품.
어느새 책 속의 주인공은 파도와 노는 윤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놀이가 절정을 향해 달려갈 즈음.
아차! 그제야 우리에겐 단 한 벌의 여벌 옷도, 수건도 없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내복과 바지 밑단이 홀딱 젖도록 짧고도 강렬했던 첫 물꽃놀이를 마치고. 세 식구는 공중화장실 앞 수돗가에 멈춰 섰다. 남편은 편의점으로 달려갔고, 난 아이의 축축한 바짓단에 붙어있는 젖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다음 여정은? 강릉 중앙시장에서 아동복 옷가게를 기웃거리며 3대 조건(싸고, 편한, 운동복 스타일, 그냥 회색 고무줄 바지)에 맞는 옷을 찾느라 진땀 뺀 1인. 바로 여기에 있다.
단 한 번, 네버랜드
소소하고 사사롭게
너의 말이 다가온 날들을 기억하며......
너의 첫 바다, 경포에서
#무이야 #무울 #바다 #2012 #두 살 #윤’s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