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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Apr 16. 2022

#햇빛 중독자

해가 나면 뛰쳐나가는 

영국 사람들은 해만 나면 공원으로 달려가 널부러져 있는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을 거다. 살아보니 이 사람들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쨍한 날이 귀하다보니 해가 비추면 얼른 나가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긴다. 특히 흐린 날씨가 예보되었던 날에 예상치 못한 햇살이 내리쬐면 그야말로 비상이다(영국의 시간별 일기예보는 꽤나 정확한 편. 물론 수시로 바뀌긴 하지만). 어떡하지, 이걸 놓치면 안 되는데. 회의를 하다가도 취소하고 나가야만 할 것 같다. 지금도 도저히 실내에 있을 수 없어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리젠트 운하로 나와 벤치에 자리를 잡고 글을 쓰고 있다.



1~3. 집 발코니에서 바라본 풍경. 날씨에 따라 매우 다르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런던은 유독 햇살 아래 그렇게 예쁠 수 없다. 며칠 연속 흐리면 우울해지고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겨울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햇빛 중독자지만 맑은 날엔 흐린 날의 설움을 싹 씻어줄 만큼 행복하다. 길들여진 걸까 싶을 정도로 해가 나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날이 길어지고 화창한 날이 상대적으로 많은 런던의 여름은 길고 어두운 겨울을 잊게 해준다.


(살짝 비껴가는 이야기) 대접 받지 못하다 한 번 잘해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마음을 떠올리니 지금은 퇴사한(『우리는 어쩌다 런던에서』에도 등장한) 크리즈가 생각난다. 로컬리제이션 팀은 업무 특성상 다른 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제품을 만들어 넘기면 우리 팀에서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만큼 출시 일정에도 차질이 생긴다. 하지만 제품 개발에 급급해(또는 자기의 상식이 글로벌 기준이라는 착각에) 우리 팀과 사전에 논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크리즈가 너무나 신나 하며 개발 팀에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기한테 미리 자료를 넘기며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했다는 것이다. 분명 좋은 일인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건데, 이게 맞는 건데. 맨날 굶기다 빵 쪼가리 하나 던져주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가 나오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나는 영국 날씨에 길들여져 햇빛이 빼꼼하고 30분만 비춰주면 몸둘 바를 몰라하는 햇빛의 노예가 되었다. 나흘 간의 부활절 연휴에 날씨가 아주 기가 막히게 좋을 예정이라 피크닉 두 번에 해변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잡아놨다. 강렬한 햇볕에 조금만 노출돼도 화상을 입어 벗겨지는 연약 피부라 왠지 며칠 후 팔에 감자를 바르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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