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보 광고에 나오는 첫번째 대사. 듣자마자 뭐지 싶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회의테이블에 둘러앉은 다 큰 어른들 입에서 잔뜩 신이 난 어린아이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현실이라면 그들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진지한 말투로 회사의 영업과 매출에 대해 떠들어야 하는데 이건 예상과 너무 달랐다. 빨갛고 노란 젤리를 손에 든 채 무슨 맛이 좋은지 논하고 있다니!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신선한 광경이었다. 광고를 본 이후로 일상에서 하리보를 떠올리는 순간이 더 잦아진 걸 느꼈다. 뭐랄까, 그 어색하고 이상한 매력에 끌린걸까. 아무튼 자주 먹고싶어졌고 그만큼 또 자주 사고 있었다.
잊지 못하는 하리보 광고의 한 장면
그렇게 젤리의 세계에 입문했다. 하리보를 먹다보니 ‘젤리’라는 걸 좋아하게 됐는데 특히 마이구미에 푹 빠져버렸다. 그런데 이 세계에 발을 들이고보니 생각보다 젤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들도 우리는 왜 자꾸 젤리를 찾고 있을까?
지금 살고있는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아파트 단지가 있다. 최근 그 아파트 상가에 ㅇㅇㅅㅋㄹ라는 무인 판매점이 생겼는데 한동안 그 앞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아이스크림이 주인공이라지만 막상 가보면 한 쪽 벽을 가득 채운 젤리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이곳이 바로 젤리 천국! 형형색색. 오색찬란. 가지각색. 알록달록. 모양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콜라, 지렁이, 지구, 곰돌이, 복숭아, 블럭, 그 외 여러가지. 겨우 젤리 한봉지 살거면서 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다. 이 봉지 저 봉지 들었다놨다 하면서 맛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내가 당장 무슨 맛을 제일 원하는지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다. 마치 어린시절, 아빠 손잡고 간 장난감 가게에서 딱 하나만 골라야하는 마음과도 같다. 바비인형도 좋고 소꿉놀이세트도 좋은데 뭘 데려가야 하나. 젤리를 사면서 묘하게 열살짜리 감성이 올라온다.
즐겨찾는 ㅇㅇㅅㅋㄹ
‘Haribo makes children happy
- and adults too’
하리보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줘요.
그리고 어른들도요.
하리보가 내걸었던 슬로건. 그들은 똑똑했다. 기꺼이 돈을 내고 젤리를 사먹는 어른 소비자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들 ‘어른'이라고 부르니까 어른인 척 하지만, 실은 마음 한 켠 열살짜리 꼬마를 앉혀놓고 사는 우리. 젤리가 웅크리고 앉은, 어른인지 아이인지 헷갈리는 그 어른아이를 일으켜 세운 건 아닐까 짐작했다.
실은 하리보도 어른들이 젤리에 열광할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다. 저 짧은 슬로건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응축되어 있는데, 1930년 하리보가 내놓은 메세지는 ‘Haribo makes children happy’ 에서 끝이었다. 당시 그들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건 그저 ‘아이들’ 뿐이었다. 그리고 30여년이 흐른 1962년, 처음 공개된 TV광고에서 ‘- and adults too’라는 말이 더해졌다. 젤리를 좋아하던 어린 꼬마가 30년 후에도 여전히 젤리를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란 게 아니었을까. 그들이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가 되었구나. 30년 전 딱 그 나이만큼 자란 어린 아이들에게 젤리 한 봉지를 쥐어주고 그 옆에서 하나둘 뺏어먹는 어느 부부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난해 2020년, 하리보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 해 12월의 어느 날, 가수 성시경이 하리보 100주년 이벤트에 참여했다는 연예면 기사를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평소 요리를 즐겨 하는 그가 하리보 캐릭터를 그려넣은 케이크 사진을 보내 1등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상품은 하리보 젤리 세트 100개. 그의 집에 배송되었을 젤리더미가 우리집으로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옆에 따라 온 기사 하나를 더 보았는데 거기에는 하리보 사장 니콜라이씨가 전하는 이야기가 번역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 봉지의 천진한 행복’이라는 브랜드 DNA를 염두하고, 노인의 입맛까지 충족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듭니다.’
천진한 행복이라니. 두 단어의 만남은 낯설지만 충분히 잘 어울렸다. 하리보 광고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신선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ㅇㅇㅅㅋㄹ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천오백원짜리 젤리 한 봉지 값이 실은 ‘행복’을 사는 값이었구나. 젤리가 좋다고 말하는 우리가 말랑말랑한 그것을 자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요기할만한 간식거리를 찾는다면 수많은 과자와 빵 중에 고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젤리를 가장 먼저 찾는 건, 하루의 어느 찰나를 형형색색, 오색찬란, 가지각색, 알록달록 물들이는 ‘천진한 행복’을 사고 싶어서였다. 20년 전, 장난감 가게에서 설렘을 안고 망설이던 그 날의 들뜬 찰나처럼 말이다.
젤리는 동화 같은 어린시절의 한 장면을 마흔에도, 쉰에도 다시 불러다주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아이와 놀이터 벤치에 앉아 젤리를 나눠 먹는 상상을 했다. 아이는 빨간 곰, 나는 노란 곰. 그럼 아이에게는 그 순간이 다시 천진한 행복이 되어 주겠지.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꺼내 먹을 수 있는, 천오백원으로 불러낼 수 있는 행복 한 봉지. 그런 의미에서 하리보의 슬로건을 다시 쓰면 이렇게 적을 수 있지 않을까.
‘Haribo reminds your childhood.
It'll be the same in 30 years.’
하리보는 당신의 어린시절을 떠올리죠,
30년 후에도 그럴거예요.
다시보는 하리보광고
글만 남기기 아쉬워 하리보 광고 30초짜리 풀영상을 데려왔다. 처음 봤을 때 느낀 신선함과 귀여움을 다시 한번 느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