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끝이 다가왔다

준비 없는 은퇴

by 크리스틴

마무리는 준비 없이 다가온다. 언젠가 끝이 오겠지 예상했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급작스럽다. 떠밀리 듯 아닌 듯 끝났지만 이건 이렇게 끝나는 게 맞겠지 싶다. 끝은 과거와의 단절이자 미래를 만나는 시작점이다. 그래서 모든 끝은 아쉬우면서도 설렌다.




처음엔 문제 되지 않던 것들이 언젠가부터 다르게 보인다. 이유는 내 관점이 변했기 때문이다. 힘들어지고 불편해지거나 불만이 생긴다는 건 내가 변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 옳고 그름이란 없고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끝이란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중단일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중단되면 열린 결말처럼 다시 재개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입사와 퇴사는 커리어의 관점에서 중단이다. 하지만 누군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면 인생은 이날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공통점은 중단이든 끝이든 하나의 역사가 완성된다는 점이다.


나의 역사는 수십 번 반복되었다. 완성처럼 보이는 조각들을 한 보따리 등에 지고 새로운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대체 이 끝은 언제일까 푸념하면서도 지겹도록 반복했다. 끝을 내고 싶었지만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부분 등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끝이란 게 왔다. 이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열심히 달렸고 지쳤고 처음의 목적을 상실했다. 상실감이 길어지던 찰나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충격에 빠졌다. 표류하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해있겠지 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와버린 기분이랄까. 게다가 비축한 식량마저 떨어져 가는 상황 같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걸 중단했다. 번아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고 더 이상 목적 없이 일할 수 없음을 느꼈다. 반골 기질이 가득한 내면은 이제 회사는 집어치우고 너의 길을 가라고 아우성을 쳤다. 게다가 이미 낭비할 시간도 기운도 없는 40대, 결단이 필요한 중차대한 시점을 맞이했다.


아무 대책도 대안도 없이 은퇴를 선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 한 가지뿐이니까.

"우와.. 은퇴라니, 축하드려요!! 그럼 앞으로 뭐하실 계획이세요? (+호기심 어린 표정)"

"혹시 이직하시는 건 아니시죠? (+웃음)"

모두 내 다음 스텝을 궁금해했고 난 일단 쉬면서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다만 직장인은 그만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짧고도 길었던 직장인이란 삶의 끝을 이렇게 맞이할 줄이야. 적어도 다음 목표를 차분히 준비하면서 맞을 줄 알았다. 그동안 입퇴사의 반복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일을 저지르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를 앞두고서 다시 돌아가긴 싫었다. 어차피 겪을 거라면 더 늦기 전에 짧고 굵게 경험하기를 바랐다. (길고 굵을 거란 생각은 왜 안 한 거임?!...)


모험 속에 온몸을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편도 자식도 없으니 내 몸뚱이만 책임지면 되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상황 속에 밀어 넣으면 내가 어떻게 발버둥 칠지 궁금했다.

그렇게 미성숙한 40대로 세상에 나왔다. 회사 안에 있을 땐 생각지 못했던 활동들을 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다음 목표를 찾는 것도, 나를 아는 일도 중요했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두둥실 흘러가 보기로 했다. 단번에 뭔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퇴직금이 줄어드는 걸 지켜보려니 심장이 쫄깃해진다.


그렇게 1년을 보낸 지금. 다음 목표를 설정했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준비 중이다.

'... 그래도 직장인으로 살 때가 편했구나...'

가끔 이런 생각도 들지만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후회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준비를 하면 되는 거니까.


앞사람을 따라 걷는 길이 아닌, 모든 걸 책임지며 걸어가는 길에 들어섰다. 어쩌면 진짜배기 인생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눈을 크게 뜨고 심호흡을 깊이 하면서 한발 내디뎌 본다.

... 뭐라도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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