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돌에 담긴 마음
[네팔의 일상 1]
순천시 벌교읍 박 감례님의 집. 마당 구석엔 차갑게 사르르 녹아버릴 주먹보다 큰 대봉이 열리는 감나무가, 또 한편엔 필요할 때건 언제든 밥상에 오를 수 있는 고추, 상추, 호박 따위가 풍성한 텃밭이 있는 집. 엄마의 어릴 적과 우리의 어릴 적이 서로 같고, 또 다르게 있는 곳. 우리 외할머니네 집.
어릴 적 방학 때면 엄마 아빠, 선생님을 대신해 우리의 주양육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곤 했다. 외할머니는 여전히 감나무집을 지키고 계신다. (절대 서울에 올 생각이 없다고, 서울 우리 집에 와계시면서도 텃밭에 잡초를 뽑아야 하고, 풀을 베어야 한다고 하시는 우리 할머니...) 우리의 기억 속 시골집과 지금의 시골집이 달라진 것이라면, 할머니 혼자 살기엔 집이 너무 크고, 적막하다는 것.
외할아버지는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은 내 중학교 시절 돌아가셨다. 워낙에 말수가 적으신 분이셨다. 화 내시는 일도 큰 소리를 내는 등의 일도 없었다. 누가 들어도 와! 그랬어? 하는 일화들은 없지만, 여름이면 늘 평상에 얇고 하늘 거리는 반팔 셔츠를 입으시곤 반주를 하시곤 하셨다는 점. 겨울이면 작은집의 아궁이에서 포일에 감싸진 감자나 고구마 등을 꺼내 주시던 점. 또 누군가 요리를 할 때건 마당 한 켠의 작은 샘 근처에 앉아 칼을 갈아주신 던 것들이 떠오른다.
마당에 있는 그 작은 샘은 허리를 굽혀 손을 넣으면 어린애는 팔 끝까지, 어른이 된 나에게는 팔꿈치 조금 넘는 정도의 깊이의 샘이었다. 사시사철 맑고 찬 지하수가 퐁퐁 솟아 늘 그 정도 깊이를 유지했다. 엄마나 할머니가 속옷이나 작은 빨래를 하거나 모든 가족들이 모이면 많은 설거지거리들을 우르르 내와하던 곳. 내지는 우리가 우물서 잡아온 다슬기들을 풀어놓는 수조 같은 것이었다.
근처에는 늘 나무로 된, 오돌토돌한 돌기들이 많이 사라진 빨래가 되는 걸까? 의심하게 만드는 빨래판, 플라스틱으로 된, 어딘가 깨져있지만 쓸 수 있는 바가지, 마을에서 폐기름을 모아 만들었다는 벽돌만 한 빨랫비누 , 그리고 까만색 반들반들한 숯돌이 놓아져 있었다. 모든 것은 누구나 사용했지만, 숯돌은 외할아버지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요리사인 아빠는 요리를 할 때면 본인의 칼 가는 도구를 사용했지 숫돌로 칼을 갈지는 않았다.)
여름이면 가만히 있어도 연신 땀이 흘러 몸이 끈적해지곤 했다. 엄마가 자라고 내가 자라는 시간만큼 오래된 선풍기가 달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회전하는 선풍기 머리를 따라다녀야 했다.
겨울이면 모두가 작은 집에 들어가 까맣게 눌어붙은 장판 위에 솜이불을 깔아 누워 있곤 했다. 장지문이 바람에 흔들려 덜컹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야 했다.
여름과 겨울, 아니 어느 때에도 밥 먹을 즈음이면 외할아버지는 늘 샘 근처였다. 편리함, 쾌적함 따위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그런 날들 속에서도 늘 그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밥 먹을 시간이 되어도 칼을 갈아줄 이는 이제 없다.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아무거나 자를 수 있고, 칼을 갈 필요가 없다는 장미칼이 그다음으로는 안쪽에 칼을 갈 수 있는 칼날이 있는 작은 도구가 순서대로 주방 한편을 차지했다가 사라졌다. 외할아버지가 없어 아무도 찾지 않는 숫돌을 대체할 물건들은 계속해서 주방에 자리 잡았다 사라졌다. 또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잠깐 차지했다 또 다른 것으로 바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칼이 갈려지고, 물이 뿌려지고, 또 말려져 중간이 오목하게 들어간 까만 숯돌은 이제 샘 근처에 그냥 돌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그 숫돌을 찾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부모님이 또 그의 자식들이, 그리고 그 자식들인 우리의 입에 들어갔을 수많은 밥들이 만들어지긴 전 어떤 마음으로 외할아버지가 칼을 갈았는지는 나는 자세히는 모른다. 그냥 매일 군 말없이 그 시간 그 자리에 외할아버지가 계셨을 뿐이다.
숯돌은 그 쓸모를 잃었다. 그래도 그것은 남아있다.
외할아버지의 마음도 없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