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노동의 신성함!
[네팔의 일상 3]
집 앞마당, 혹은 길 한편에 깨끗한 천이나 천막 등을 깔려 있다. 그 위로는 곡식이며 채소 따위가 이곳의 사람들을 닮은 온순한 바람과 볕에 제 몸을 작게 말리고 있다. 이러한 익숙한 풍경은 순천 우리 시골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어릴 적, 사교육의 현장에 내던져지기 전 방학이면 늘 우리 삼 남매는 시골로 보내지곤 했다. _시골에서 놀다 오자~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친구들도, 놀 거리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도 온갖 재미있는 것들은 서울에 다 있는데, 어째서 놀다 오자고 하자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판매하는 어린이 세트의 공룡이나 달마다 나오는 장난감 따위를 손에 넣기 위해 몇 번이고 흔쾌히 귀양을 가곤 했다._
순천, 그 시골 벽지에 갇히기 전에 엄마 아빠는 늘 시내에서 제일 큰 마트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먹고 싶은 것들을 다 고르게 했다. 서울 집에서는 매일 학교 갈 때 주어지는 천 원 용돈이 다였는데…_문방구에서 파는 컵떡볶이가 300원, 교통비가 왕복 200원이었다. 충분히 간식거리 할 정도는 됐지만 어린이 세트에 먹고 싶은 것을 다 고르라니?! 어린이날이나 생일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호사 아닌 호사였다._ 우리 삼 남매는 햄 통조림, 과자며 라면까지 종류별로 카트를 그득그득 채운다.
아빠의 오래된 승용차 트렁크엔 우리 삼 남매의 옷가지와 마트에서 또 엄마가 챙겨 온 반찬들이 자리를 잡곤 했다. 한 손에는 과자봉지나 간식 따위가 또 한 손에는 쉬이 얻어낸 장난감이 하나씩 들려있는 우리들이 뒷좌석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엄마 아빠가 떠난 후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 가득한 시골 라이프가 시작된다. 외할머니는 우리들에게 늘 텔레비전이 있는 큰 방을 내어주시곤 했다. 그곳에서 주말이면 새벽 깨 틀어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늦은 밤 수신이 끊길 때까지 방송을 보곤 했었다. 방학숙제는 방학이 끝나기 전 늘 몰아서 하기도 했고, 외할머니는 우리들에게 따로 공부를 하라던지, 조용히 해야 한다던지 잔소리를 일절 안 하셨기에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었다.
보통 이주 정도가 지나면 상황이 바뀌곤 했다. 아무런 제약 없는 삶에 지루함과 권태를 느끼게 되고, 심지어 우리들의 혀를 즐거이 해주는 식량들도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엄청난 편식쟁이 었기에 약간의 단식투쟁을 시작하곤 했다._지금도 편식을 하긴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군 냄새나는 시골 밥, 젓갈이 잔뜩 들어간 김치, 산에서 난 나물이나 심지어 생선도 잘 안 먹곤 했었다._ “괜찮아요, 배 안고파요”라는 말로 아침을 거르고, 외할머니가 농사일을 나간 새에 찬장에 숨겨져 있던 마지막 초코파이나 라면 등을 야금야금 꺼내 먹는 것도 하루 이틀 지나고 나면 동이 나곤 했다. 그때쯤 되면 서울 아가들 잡겠다며 외할머니는 걱정을 하며 우리들에게 소일거리를 던져주시곤 했다.
우리는 아침이면 할머니를 따라 고추를 따고, _남동생은 할아버지와 소를 몰고 뒷산으로 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가에 소가 딱 한 마리뿐이었고, 보통은 여물을 먹곤 했는데 이 때는 늘 할아버지, 남동생, 그리고 소가 마실 나가듯 외출을 하곤 했었다._ 밤이면 손톱이 까매지는지도 모르고 숟가락으로 도라지 껍질을 까곤 했다. 그러고 나면 늘 읍내 장에서 사 온 과자들이나 통조림 햄 등이 포상으로 주어졌다.
그 어린 시절, 처음으로 경험한 ‘일 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노동의 신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