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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편.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

아이는 어른보다 너그럽고 쉽게 용서할 줄 안다.

by 김현이

<속죄>, 이언 매큐언의 장편소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이기도 한 남녀 간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 원작속의 또 다른 원작자인 브리오니가 실제의 비극을 다소 미화시켜 세실리아와 로비의 사랑의 결말을 자신의 소설 인 <속죄> 속에서 나마 실현시킴으로써 원작자로서의 전권을 전횡적으로 행사하는 속죄의 최고의 권력자, 차마 해피앤딩이라 부를 수 없는 결말, 미화라고 할 것 없는 약간의 꾸미는 속임수를 써서 그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자기 자신의 잘못된 원인에 의해 그 연인의 운명을 너무나도 비극적인 슬픈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에 대한 속죄 – 어톤먼트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다고는 회상하지만 그건 단지 원작자인 브리오니의 허영과 자만인 자기만족에 불과하며 독자인 나에게는 오히려 정반대로 오만이 가득한 변명으로써 다가왔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대한 표출의 이유였었다.


나는 며칠 전 새벽이 찾아오기 직전인 날이 틀 무렵, 내 꼬마들에게 완전히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그 시간에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에 대해. 그것을 나는 이렇게 생각해 왔었다. 비극을 조금이라도 순화시켜서라도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힘을 휘두르고 싶어서라고. 나는 그 시간에 정말로 마음이 아파서 울었었다. 그리고 <속죄>의 결말을 어떻게 해서든 바꾸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에 속한 일이라는 사실에 또 다시 마음이 아파와 오래 전 <속죄>에 울었던 젊은 나보다 몇 배는 더 큰 슬픔을 느끼고 울었었다.


<속죄>의 슬픔은 우리 곁에 우연처럼 왔다가 너무나도 쉽게 미련 없이 떠나가는 가을날들처럼 동이 트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내 시야를 멀어지게 만들었었다.


어릴 적 느꼈던 슬픔들과 현재의 슬픔들, 슬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슬픔의 감정이 실제로 어떻게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성인이 되고나서도 훌쩍 지나버린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스트릭랜드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도록 만들었던 원인은 바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었다. <달과 6펜스>에서 그는 문둥병에 걸려 병균이 두 눈알을 파먹어 썩어 문드러진 상황에서도 움막 안에 그만의 독창적이고 놀라운 세계를 완성해내고 죽어갔다. 그 상황을 조용히 이별의 슬픔과 고뇌의 고통을 견뎌주던 아타의 행동에서도 나는 마음 아픈 슬픔을 느끼고 울었었다. 스트릭랜드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혼보다 그런 지고지순한 아타에게 훨씬 더 감정이 이입되어 울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덥던 지난여름과 달리 20년도 넘은 그 시절 나에게는 어떤 슬픔이라기보다 과장된 허영으로써 다가왔었기에 나 자신은 이제 슬픔이란 걸 경험해 본 것은 아닌가 짐작하게 되었던 것도 있었다. 슬픔의 경험이란 그 때 당시는 모르게 지나가서 사라져버리는 어떤 시간의 흐름과도 비슷한 것이리라. 어쩌다 우연한 계기 – 소설이나 영화, 또 다른 경험들 – 로 달려들어와서 잠자고 있는 기억을 툭 건드려서는 마음속에 아픔을 안겨주고 시간이 가듯 지나가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찾은 <달과 6펜스>에서는 스트릭랜드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던 아타의 아픔이 나에게도 통렬하게 느껴졌으므로.


그리고 나의 첫 장편소설인 <나의 계절들>의 수인은 스무 살을 넘어가던 해 겨울, 아홉 살 여름방학 때 떠났던 봉수를 재회하게 되지만 10년이라는 훌쩍 길어져버린 시간은 수인과는 너무나도 달리 세련된 모습을 하고 나타났던 봉수의 모습에서 그 옛날 추억속의 행이짓거리의 사건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에 반해 수인은 여전히 촌스럽고 수수하고 앳된 스무 살의 큰 수인이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몇 번 연락이 더 되어 만남이 이어졌지만 1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수인과 봉수와의 간격을 좁혀갈 수 없도록 굳히고 말았고 어쩌면 봉수에게는 더 이상 어린 시절의 풋풋함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는가 싶은 아쉬움에 그것을 순수하게 간직해 왔던 수인에게는 누군가 주지도 않은 상처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마음을 잠그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슬픔도 이별의 쓰라림도 아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홉 살 여름 방학 때 봉수가 떠나가면서 어쩌면 이런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그 소설의 후속타를 스스로 그렇게 설정해 버림으로써 수인이가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10대 시절 그리던 미래, 어쩌면 그리던 대로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순수했던 그 지난날들에 대한 아쉬움이 아련한 슬픔으로 밀려들어왔던 날들이 있었었다.


<나의 계절들>의 원작자인 나는 수인이가 몇 살인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20대의 커버린 봉수와의 재회만 없었다면 또 다른 <나의 계절들>이 나올 가능성은 더 많아졌을 테지만 원작자인 나는 봉수가 어디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니까.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데는 많은 이유는 없다. 현실에서 어쩌지 못하는 것들을 내 마음대로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 쓰고 싶은 소박함이 있을 뿐이다. 나야 원래 어떤 것에 많은 걸 바라지 않던 꼬마부터 시작했었으니까. 어른이 되면서 아니, 나는 그 꼬마였을 적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양보하고 아픔과 슬픔을 참아내는 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던 시시한 아이였으니까.


그런 내가 내 꼬마들 앞에 나서면 언제나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기만 한다. 서툴고 부족하고 그래서 더 성급해져 서두르고 그러다간 결국에는 우리들 중 누군가는 꼭 슬픔을 느끼도록 만들어 버린다. 아마도 슬픔을 느끼는 쪽은 나와 꼬마들 비슷하리라. 다만, 그 미안함의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이 되는 가에 달라질 뿐. 여태까지 내가 느낀 바에 따르면 확실히 꼬마들은 어른인 나보다도 슬픔, 분노, 화 그리고 미움에 상당히 너그럽고 관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잘 해준다는 것이 가장 큰 다른 점이다.


5일간을 연속으로 쉬고 난 뒤의 아침시간이었다. 집을 나서야 할 시간 직전까지 아무생각도 없이 방심하며 놀고 있던 작은 꼬마가 그림일기, 받아쓰기 숙제를 어디에다 두었느냐고 인상을 쓰고 찾아내라고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자기만의 비밀 장소에다 무언가를 숨겨두는 것을 좋아하는 작은 꼬마를 알고 있었기에 책장의 꽉 들어찬 책들의 키가 남은 그 좁은 틈에서 받아쓰기공책과 그림일기장을 찾아내서 작은 꼬마 앞에 내 던졌다. 이미 평소보다 10분이나 넘게 지체했었기 때문에 화를 감추고 어떻게든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현관문 밖에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고 서 있었던 가장 작은 꼬마 녀석 때문에 이웃 집 아주머니에게 내가 아이의 사소한 잘못에도 쉽게 화를 내는 성마른 엄마로 인식이 될 그런 상황이 전개되어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타인에 대한 자신의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커지기 마련이므로 나는 작은 꼬마에게 큰 소리로 나무랐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아이가 느꼈을 슬픔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만이 커질 뿐이었다. 화가 났을 때는 빨리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일찍 해소하는 방법이 된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들고 내려온 분리수거 봉투를 내다버리는 시간까지 약 5분 정도가 흘렀다. 저 멀리 아파트 출입로에서 멀뚱하게 서 있는 작은 꼬마를 다소 엄격한 목소리로 불렀다. 서두르지 않으면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다 지각이라고. 이러는 사이, 아! 그래 가장 작은 꼬마, 작은 꼬마가 없어진 것이다. 작은 꼬마를 차에 태우고 가장 작은 꼬마를 찾으려고 등을 돌리자 그 작은 꼬마의 작고 통통한 손에 이파리가 안 달린 구절초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이 꽃한테 물을 많이 주든지 어디에 꽂아 놓든 그것은 엄마가 알아서 해. 그러면 엄마 기분이 다시 돌아올 거야.”


또 다시,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건 사소하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슬픔의 상황을 유발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슬퍼하며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비록 그것들이 하찮은 슬픔들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것처럼 내 삶의 원작자로서 또 다시 전횡을 휘두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누구의 삶도 해치지 않는, 설령 그 소설속의 절정에 긴장과 박진감이 떨어져 흔해 빠진 이야기가 되어 버릴지라도 내 꼬마들에게는 비극을 써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무렵의 계절은 마치 속도를 내며 범인을 추격하는 추리소설의 한 장면처럼 숨 가쁘게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나의 꼬마들에게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무척 추울 것이라고 겁을 주었었다. 그건 기온이 하루 씩 뚝뚝 떨어지는 이 무렵에 한 여름 옷차림을 하고 춥다고 호들갑을 떠는 큰 꼬마를 훈계하려고 한 것뿐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겨울은 그 어느 겨울보다 춥게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날 가장 작은 꼬마가 건넨 구절초 한 송이를 좀 얇은 듯한 <네버 렛 미 고> 중간 페이지 사이에 꽂아 둔 것은 두꺼운 수술이 다소 가벼운 책 사이에서도 납작하게 잘 굳어지길 바라는 바람이 섞인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작은 꼬마의 키가 지금보다 5센티미터 정도 더 컸을 때 납작하게 잘 마른 구절초 꽃을 보여줄 때에는 <네버 렛 미 고> 속에 남은 구절초 꽃 수액의 흔적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어때? 내 인내심이. 대단하지 않니? 이제는 꽃잎이 떨어지지 않도록 내 몸을 조금 더 두꺼운 책 속으로 옮겨주지 않을래? 맞은편 책장에 마침 <부활>이 지금 <네버 렛 미 고> 보다는 몸집이 더 크니까 거기라면 좋을 것 같아. <부활> 도 아니라면 엄마가 자주 펴 보시는 <톨스토이의 인생론> 도 좋아. 그 책은 1000쪽도 넘어서 마치 백과사전과도 비슷하고 또 엄마 눈에 자주 띄면 가장 작은 꼬마인 너의 생각도 자주하게 될 테니까.”


하고 나직한 구절초 꽃잎의 속삭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될 가장 작은 꼬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막 제 몸을 말리기 시작한 구절초 꽃잎을 아주 살며시 들여다보았었다. 제 몸을 원래 모양대로 잘 말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벌써 몸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린 탓에 책의 종이가 둥근 모양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네버 렛 미 고>를 덮어 주었다. 구절초만의 시련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때론, 나는 꿈꾼다. 나의 인생이 조금 비극적이 될지 모르더라도 그 비극이 내 꼬마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으로 남지 않게 되기를.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원작자로서 훌륭한 비극을 써낼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어차피 타인들에게는 허구에 불과할 뿐이라지만 나라면 그럭저럭 잘 해낼지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자만이 있으니까 나의 그 형편없는 지독한 초안대로 될지도 모른다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감정과 사건들을 미처 들어보지도 못한 낱말들이 넘치는 말들 속에서 내가 어떻게 주어와 동사와 형용사와 때로는 감탄사들을 가장 알맞은 자리게 앉히고 섞어가면서 문장들을 만들어 낼 것인지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날도 많지만 어쨌든 남들이 비극을 지나친 슬픔으로 잘 눈치 채지 못 하도록 노력은 해 볼 것이다.



2018. 10. 10. 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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