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에서는 영국문화원에 등록하여 본격 영어 공부에 주력하니 점점 여행객이 아닌 현지인이 되어갔다.
주된 일과는 지하철을 타고 문화원에 갔다가 돌아오면 밥을 해 먹고 가끔 세탁소 아저씨와 근처 장을 보러 가는 것, 저녁엔 주로 아랫집 아주머니와 집 앞 공원을 걸었다. 밤 9시가 되면 마을 입구 도로에 게이트 문이 닫히는 시스템으로 인도에서 밤 산책이 가능하고 조용한 우리 동네가 살면 살수록 마음에 들었다. 여간 심심하면 행선지가 없이 자전거 릭샤를 무작정 타고,
“그냥 이 동네 여기저기 알아서 한 바퀴만 돌아주세요.” 했다.
그렇게 단골 자전거 릭샤가 생기고 아저씨와 친해지니 어느 날부터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 샵과 동네 숨은 맛집에 알아서 데려다주시곤 했다. 어느 날은 국숫집이었는데, 같이 드시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시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릭샤안에서 낮잠을 주무신다. 여행을 넘어서 그들의 삶에 들어가 함께하는 기분이 꽤나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웠다. 사람이 싫어서 혼자 여행을 고집했는데 사람을 통해 얻는 행복에 매료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은 시작되었다. (늘 사건은 있다)
여느 때와 같이 세탁소 아저씨와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는데 늘 문이 닫혀 있던 미용실에 사람이 있다. 궁금했던 터라 냉큼 들어가 보니도구들이 희한하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펌 도구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스틱 롤이 아닌 나무로 머리를 말고 있다.
“재미있네, 아저씨(실제 한국발음 아저씨라 불렀다) 나 머리 감기도 귀찮은데 펌 한번 해볼까?”
“오, 송, 진짜 잘 어울리겠다. 내가 짐 가져다 놓고 데리러 올 테니 한번 해봐.”
“얼마예요?”
내 두 귀를 의심했다. 단돈 오천 원이면 펌을 할 수 있는 나라. 부담 없는 가격과 오랜만에 미용이라니, 나는 충동적으로 저질러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거울 앞의 내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는 사장님의 기분을 고려해 웃고 있긴 했으나, 당황한 나는 귀까지 빨개졌다. 우리 할머니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나무 롤이 좀 얇다 느끼긴 했었는데 펌의 굵기가 얇아도 너무 얇아 꽤 길었던 머리 길이가 귀밑 선까지 줄어있다. 수백 개의 검은색 용수철들이 머리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미 저지른 것 다시 펼 수도 없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고 미용실을 나와 터덜터덜 걷는다. 저 멀리서 아저씨가 다가오는데, 나를 보자마자 웃음보가 터졌다. 솔직히 아저씨는 예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람 눈은 다 똑같은가 보다. 미용실 사장님도 웃음을 참고 있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