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행정 처리를 부탁해요.

by 이해린

유럽의 행정시스템이 극악무도한 것은 너무나도 잘 안다.

행정체계에 대해서 굳이 알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겪은 경험들이나 오래된 구전설화처럼 입에서 입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그런 무서운 이야기들로 모두가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지인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속도와 조금은 이상하다시피 짜인 행정구조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계획과 인내심은 필수다.

하지만 100개의 계획 중 101개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기이한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다.

해가 바뀌는 와중에 잠시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그대로 락다운이 이어지며 언제 그랬냐는 듯 폭죽의 긴 꼬리처럼 조용히 사그라들고 있다.

인내심은 진작에 바닥이 난 와중에 비자 연장을 하고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옆 나라로 이사를 가라고?

해내야 되는 것을 알고, 할 것이고, 반드시 해낼 것이지만,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망했다는 생각뿐이다.

하나씩 준비를 하는 단계에서 그렇게나 쉽고 사소해 보이는 절차조차 두어 번씩 꼬이고 마는 이 불상사를 마치 남의 일처럼 관망하며 스리슬쩍 자리를 피하고 마는 정신머리는 어떻게 단속할 것이며, 다그쳐서 다시 정신줄을 잡은들 눈 앞에 보이는 이 오만가지 서류는 다 누가 처리해주려나 싶다.

리스본은 지난 월요일부터 계속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그것마저도 시원찮게 내리는 소나기가 아니라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방향을 제멋대로 바꾸어 흩날리는 부슬비다.

그런 주제에 또 하루 온종일 내리니 기분은 꿀꿀하고 집 안은 어두침침하고 눅눅해서 할 수 없이 아껴둔 라면 봉지를 뜯게 된다.

냄비를 받치는 건 역시 무슨무슨 상을 받았다는 칠백 페이지 가량 되는 인문학 서적 사피엔스, 오늘도 요긴하게 쓴다.

계란을 톡 깨트려 넣고, 소중한 만두까지 서너 개를 동동 떨어트려 완성한 라면 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그 와중에 패드 화면을 켜 경찰청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익숙하게 자동완성어로 올라가 있는 여권번호 국가 이름 생년월일 거주지역 등을 하나씩 눌러 빈칸을 채운다.

NO HAY SUFICIENTES CITAS DISPONIBLES
Lo sentimos, pero en éste momento la Oficina no puede ofrecerle una cita para atender su solicitud.
Por favor, vuelva a acceder más tarde.

“미친.”

그럴 줄 알았다.

눈으로 실컷 욕을 하고, 젓가락을 두어 번 놀려 라면 다발을 집어 입 안에 고이 포개어 넣는다.

우물거리는 동안에도 두어 번을 더 노력했으나 허사다.

도대체 누가 예약 신청하기는 하냐? 이거 다 사기 아니야?

하다못해 음모론을 제기해버리고 마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 라면에만 집중한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으휴.

만두를 반으로 쪼개어 김치 한 조각과 입 안에 넣으면 혀를 따스하게 감싸는 그 순간을 향유한다.

나훈아 콘서트 티켓팅을 한다고 한들 이거보다는 가능성 높겠다.

고등학교 모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면서부터 눈을 뜨게 된 티켓팅 세계는 치열하고 냉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게 콘서트가 됐든, 수강신청이 됐든, 자격증 시험장이 됐든 가려는 곳을 가고 하려는 것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뜻이 있으면 다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뭐.

“어으, 시원해.”

데워둔 밥을 라면 그릇에 빠뜨려 한 번 눌러 으깨준 다음에 숟가락에 가득 담게 퍼올려 입으로 직행한다.

그러게 말이다. 지금은 뜻은 무지하게 있는데 왜 아무도 길을 안 보여주느냔 말이다.

이 정도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이 없는 수준이다.

경찰청에 사이트는 도통 자리를 안 빼주지, 포르투갈 이민국은 전화선은 모조리 뽑아놓은 건지, 이삿날은 다가오는데 나온 집은 없지.

국경을 맞닿은 나라에 비행기로 2시간이면 갈 도시를 비행 편을 다 취소시켰다고 세 나라를 경유해서 가라고 하질 않나.

이렇게까지 됐으니 차라리 나뭇잎을 엮어 젓가락으로 노 저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말릴 사람 없을 거 같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더 말이 될 거 같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웅얼거리며 침을 퉤퉤 뱉어도 결국 내가 바라는 건 한 달 뒤에는 이렇게 쓴 글을 보고 웃어넘길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게 참, 낙관적인 바보인 건지, 바보 같은 낙관주의자인 건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천천히 탑재하게 된 건 수많은 시행착오 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시행착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거라서 사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가 무슨 생각으로 견디고 버티고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답을 알 수 없는 이 지루하고 고단한 인내 끝에 어떤 달콤 씁쓸한 결과물을 얻고자 라면 그릇을 부여잡고 온기를 느끼려 하는 걸까.

연일 내리는 이 비가 얼른 그쳐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꿉꿉한 이 내 마음에도 햇빛 한 줄기를 쏘여 구김살을 하나씩 다려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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