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클럽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 익숙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건 내게 정서적 고행이다. 하지만 결심을 세우자 채비를 마치는 건 일도 아니다. 바르셀로나 시내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 나는 소크라테스 클럽에 참여합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지 2주 차, 시간은 어영부영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시내를 구경할 호기심은 의외로 동하지 않았다. 7월 한 달 가족여행이 예정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이런저런 감회를 함께 나눌 이가 없다는 건 도시 탐방의 의지를 한 풀 꺾어 놓았다. 소싯적에는 나 홀로 여행을 분기별로 가던 때도 있었건만 지금은 여행이나 경험에 대한 전반적인 가치관이 많이 변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캠퍼스나 근방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잔잔한 일상으로 시간이 흘러갈 뿐이었다. 연구실에서 과제하기, 러닝 하기, 장보기, 카페 가기 등등. 배경만 바르셀로나지, 한국에서의 활동 범위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결심하게 됐다. 낯선 사람 무리에 몸을 던져보자.
밋업이라는 어플을 설치했다. 우리나라 소모임이나 트레바리 같이 공통 관심사 아랫사람들이 활동을 꾸려나가도록 돕는 플랫폼이다. 밋업 상단 검색 바에 토론과 독서 모임을 입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대주제인지 해당 키워드 아래 등록된 정기 모임이 꽤 다채로웠다. 그중에 내 이목을 끈 두 모임이 있었다. 이름하야 ‘소크라테스 클럽’과 ’내향인을 위한 북 클럽‘이었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마다 영어로 진행되는 토론 모임이 정기적으로 있었다. 시간을 보니 8시 반. 지금 내가 비척비척 대고 있는 이곳의 시간은 6시. 당장 준비해서 나가면 넉넉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겠다 싶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좀 만나 보자, 캠퍼스에만 있다가는 하루 종일 입에 거미줄만 치겠다. 결심을 한 번 세우니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소크라테스 클럽에는 어떤 학자들이 나오게 되려나.
장소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분명 도로명 주소를 제대로 보고 찾아왔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응답하는 이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길래 닫히는 철문 사이에 손을 넣어 겨우 밀고 들어갔다. 내 뒤로 키 큰 갈색머리 남자가 한 명 더 따라 들어왔다. 갈색 머리 남자도 나와 목적지가 같았다. 알고 보니 이 사람도 닫힌 문 앞에 서 있다 열리는 틈을 보고 날 따라 들어왔더란다. 소크라테스 클럽의 장소는 어느 호스텔의 라운지였다.
여덟 시 반을 막 넘기는 시각, 둥글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까이 가니 그들이 오늘 소크라테스 클럽에 모인 학자들이었다. 가운데서 쾌활한 웃음을 띠고 있는 남자는 오스카, 그는 소크라테스 모임의 진행자였다. 오스카는 먼저 숙지해야 할 규칙과 진행 순서 등에 대해 안내해 주었다. 모두에게 너그러울 것, 생산적인 의견을 주고받을 것, 언쟁이 아닌 토론을 할 것.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원하는 이는 토론 안건을 상정한다. 여러 건이 나오면 투표에 부쳐 다수표를 획득한 안건이 그날의 토론 주제가 된다. 서로 한 명씩 돌아가면서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다. 모두 의견을 제시한 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반박하거나 동의를 표할 수 있다. 그리하여 토론의 막이 올랐다.
나도 하나의 안건을 상정했다. 행복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안건도 여럿 제시 되었다. 인간의 행복은 어떤 근본적인 원인으로부터 발생할까, 인공지능의 발전에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요, 등등. 그중에 채택된 안건은 어떤 스페인 여자의 그날 있었던 일로부터 시작된다.
“제 차가 고장 났어요. 엔진을 갈아야 한다고 했어요. 난 원래 혼자 문제를 고치는데 익숙해서 당연히 이 문제도 내가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비소에 가서 필요한 걸 사고 집에 가서 손 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정비소에는 다 남자들 밖에 없었거든요. 내가 필요한 부품을 사려고 하니 계산대에서 물어보더라고요. 너 이거 어떻게 쓰는지 아냐고. 모른다고 했죠.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이 집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네요. 말하는 걸로 봐서 집에 손을 줄 남자가 있냐는 거였어요. 없어요, 내가 혼자 해야 돼요. 대답하니까 놀라는 눈치였어요. 이게 왜 놀랄 일일까, 왜 애초에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할까, 여자가 해야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게 정해져라도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이 안건을 상정하는 거예요. 여자와 남자가 성별에 따라 역할이 정해져 있을까? 성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게 사회 전체에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그게 내 안건이에요.”
열두 명의 토론자 중 절반은 남자, 절반은 여자. 오스카는 오늘을 위한 안건이라고 손뼉을 쳤다. 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친절해야 돼, 그럼 시계 방향으로 발언을 시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