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너 수영도 해?”
“왜, 하면 안 되냐?”
“그건 아니고. 예전에는 운동 이런 거 싫어했잖아. 땀난다고.”
“그래서 수영하는 거야. 땀 나는 걸 모르니까. 그리고 수영장 냄새가 좋아. 물 안에서 움직이는 느낌도 좋고. 진작 배울 걸 그랬어.”
“극단적 반움직임주의자가 변했네.“
“그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럼 우리는 아직 변하려면 멀었네.”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냐? 물이 반이나 차 있네 사고방식은 여전하네, 너는.”
“너도 물이 반이나 비었네 사고방식은 그대로네.”
많은 게 변했어도 정작 서로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은 지워지지 않은 채 화석처럼 굳어 있다. 매사에 긍정적인 너와 비관적인 내가 한 매듭에 지어진다는 것에 주변 사람들은 곧잘 웃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너는 긍정적인 비관주의자고 나는 비관적인 낙관주의자였기에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소실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간과했기 때문이다.
접영을 하면 늘 팔이 엇나갔다. 물을 밀치는 힘이 부족해 팔은 직선이 아닌 애매한 호를 그리게 된다. 팔 자세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하니 다리에 힘을 싣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돼 결과적으로 접영을 하면 한 바퀴도 못 가서 팔다리 어느 하나 제 구실을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수영 다녀왔어?”
내가 구사하는 접영의 패배 공식에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무렵, 생각의 줄기를 툭 잘라버리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맞은편에서 가까워져 오는 너를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그 잠깐동안 연한 회색 빛이었던 반팔 티셔츠가 젖은 머리칼 끝에서 번져 나가는 물기로 진해진다. 쥐색으로 얼룩덜룩하게 변해가는 티셔츠를 등 뒤에서 탈탈 털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아무리 여름이어도 뜨끈한 바깥 온도만 믿을 것이 아니라 대충이라도 수건으로 털어 줬어야 했나 보다.
“감기 걸리겠어 너.”
“금방 마를 줄 알았는데.”
아니네, 머리를 뒤로 넘기며 수영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를 두어번 비틀어 짜니 어디서 그렇게 물기가 배어 나오는지 물방울이 후두둑 아스팔트 위를 적신다.
“어, 완전 물수건이네.“
웃으며 올려다본 너의 입매는 반대로 잔뜩 굳어 있다. 흰 반팔 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단정한 모양새가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바로 세운 등허리와 어디에 둘지 몰라 애매하게 떠도는 시선 같은 게 답지 않다.
“너 어디 아파?”
“나 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기습처럼 날아든 말에 입이 작게 벌어진다. 뭐야, 갑자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장난이라고 선뜻 치부하기에는 전해져 오는 목소리의 떨림과 호흡의 불안정함. 불안하게 배회하는 너의 시선까지 헤아려보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진심으로 다가온다. 차라리 장난끼 서린 웃음이 뒤따르길 기대했건만 그에 상반된 낮고 무거운 정적이 깔린다. 진동하는 금속추처럼 방향과 속도를 잃고 떠도는 시선을 곧게 마주한다.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 무슨 말 하는거냐.”
오래 간직해온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넘실댄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올려다본 너는 아무렴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이제야 편안함을 되찾아 내가 늘 마주해왔던 얼굴로 돌아왔다. 긴장을 한껏 머금어 뻣뻣해 진 마음이 조금씩 이나마 풀어진다. 정말이지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이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내심 바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 대한 마음을 숨겨두고 있었던 걸 네가 알아채 주거나 인기척이라도 느꼈으면 하는 은근한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감정과 맞닥트릴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온전히 나만의 착각일 거라고, 혹은 착각인 편인 것이 낫다고 여겼나 보다.
기대감에 부푼 내 모습을 보는 건 꼴사나운 일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널 향해 품은 그 감정의 진위를 밝히는 게 어렵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너의 감정을 멋대로 짚어내는 것도 얼음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이리 재나 저리 재나 골치 아픈 애물단지로 치부되어 아름답고 지켜내야 할 존재가 아닌 창고 구석에 쌓아 두어 색이 바라길 기다렸다.
훅 끼쳐오는 더운 바람에 이마 위 머리칼이 작게 흔들린다.
“나도.”
“어?”
어색하게 되묻는 네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해서 작은 웃음을 기쁜 마음으로 삼켜낸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흘러가는 시간의 지표 선상에서 우리 둘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마 같은 점 위에 서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랜만인 일이다.
평행선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앞에 가는 바람에 흐트러진 너의 뒤통수를 볼 때도 있었지만, 또 어떤 때는 나 혼자 발을 구르며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달리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닿지 않는 거리를 실감했다. 아무리 뒤쫓아 가더라도 우린 애초에 같은 선 위를 달리고 있지 않았다는 걸 너를 추월하는 순간 깨달았다.
“처음에는 나도 긴가민가 하더라고. 이상하잖아, 내가? 좋아한다고? 너를? 왜? 진짜 어이 없어.“
거대한 장난의 일부인가 싶을 정도의 도발을 던지고선 너는 그저 태연하게 가만히 눈을 내리 깔며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근데 자꾸 생각나잖아.”
답을 기다리는 기색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괜히 돌아가는 대답의 첫 마디가 다 갈라지는 쇳소리로 나온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솔직히 헷갈리고 속 시끄러워져서 너한테 털어놓는거긴 해, 나 편해지자고. 밤에 잠 좀 자게.“
해를 등진 내게서 뻗어 나간 그림자 인영 위로 겹쳐오는 너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결론은 나긴 했어? 어떻게 됐어?”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만화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사람들 얘기를 하듯 물음을 던졌다. 붉어져가는 노을에 잔잔한 온기가 살결 위에 내려앉을 즈음, 우리의 관계도 모습을 달리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놓여있는 작은 쉼이다.
“아직 열린 결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