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당신은 멀리 서는 기묘하게도 고요하게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밀려드는 파도 속에 겨우 숨만 쉬는 누군가를 목격한 적이 있나요? 밀물 때를 맞추어 바닷물이 조금씩 고여 들 때, 발목을 간지럽히던 물결이 어느새 허리춤에 달해 놀란 나머지 밖으로 헤엄쳐 나오려 하지만 이미 물은 그 사람의 목 밑에서 찰랑이고 있었답니다.
저는 그 사람의 굽이 치는 인생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아마 저에게 입으로 전해주는 그 말들조차도 겹겹이 속사포처럼 흘러내리는 눈물과 삼켜내야 했던 울음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겠지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끈질기게 그 사람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는 그 사람이 커가면서 점점 더 무거워졌다고 합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본인이 견딜 만큼만의 하중이 그대로 그를 짓눌렀고,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무게 추가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다고요. 대학생이 되고 나선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고 하는 그 말을 듣고 저는 가슴이 아파서 차마 그 눈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졸업식 날에는 학과 사무실로 찾아가 졸업증서 한 장을 건네받고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그는 담담히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 그 사람이 사는 중에 제대로 쉬어 본 적 없다고, 언제나 뛰어야 했고, 일을 해야만 했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어야 됐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와중에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갔고, 저는 애써 모른 척했습니다.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이 남들보다 더 험한 흙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전거나 차를 타는 사람도 있지만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그간 밟아왔던 길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바람에도 중심을 못 잡고 옆으로 픽 쓰러져 버리는 심지가 약한 저이기에 더욱이나요.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시련으로 깊게 병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상념 속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의 입술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어느 한 구석이 묘하게 가시 돋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고는 합니다. 조금 더 남들에게 친절했으면, 더 자신에게 너그러웠으면 하는 작은 욕심이 납니다.
하지만 그건 저만의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그 사람은 나름의 영역에서 관용을 베풀고, 서투른 손짓일지 언정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돌봅니다. 더 이상을 묻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요새 들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봄이 오는 신호가 길가 도처에 보입니다. 보랏빛 벚꽃 잎이 시멘트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지다, 뒤척이는 바람에도 가지를 흔들어 댑니다. 그 사람의 집에 내려가는 길에 보도블록 사이로 움튼 싹을 보았습니다.
시멘트 틈바구니에서도 꽃을 틔우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닐까요? 맑은 하늘과 따뜻한 공기에 둘러싸여야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면 이 세상이 등지는 존재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늘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줌의 흙 속에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구정물을 머금고서라도 파란 이파리를 뻗어 나간다면 그 또한 소중한 생명의 자락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동정하지도 연민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당치 않은 소리예요. 다만, 그 사람의 단단한 아귀에 생명줄을 쥐는 억척스러운 그 힘이 언젠가는 그의 꿈을 일구어 낼 원동력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 사람은 언제 말했습니다, 널 만난 건 내 모든 불행 중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맞닥트린 모든 불행한 조각들을 맞추어 보니 제법 다행스러운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