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세상에는 우연을 가장해서 은밀하게 다가오는 만남이 있는 것 같아. 작년에 너랑 메시지를 하면서 얘기를 했을 때만 해도 난 너를 실제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내가 학기 중에 한국에 있을 동안 한 열성적인 젊은 교수님 덕분에 스페인어 수업은 새벽 2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고, 난 그럴 때면 해가 지고 있다는 너의 저녁을 두드렸어.
시간을 거슬러 일곱 시간 전을 살고 있는 너는 매번 꼼꼼하게 내 메시지를 읽고 답장을 보내줬는데 주제에 따라 넌 음성 녹음을 해줄 때도 있었어. 할 말이 많아서 그래, 라고 하면서 녹음을 하는 널 상상하니 웃기기도 했고, 형체 없이 목소리만 들려오는 게 1과 0의 네트워크 세상에서 벗어난 기분도 들었어. 어떨 때는 스페인어 문법을 설명하거나 발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려주기도 했고, 가끔은 이상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을 비틀어 보기도 하고, 종종 저녁에 뭘 먹었는지 묻기도 했어.
그러면서 난 너에 대한 작고 소소한 일들을 점차 알아가게 됐어. 너의 어렸을 적 동네나 너의 독일인 할아버지와 브라질리언 할머니를 알게 됐고, 너의 불타는 정의감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어떤 오레오 맛을 좋아하는지, 네가 고향을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떠나야 하는 이유를 배웠어.
메시지 창은 점점 길어지고, 중간에 어떤 하나가 생각이 안 나면 검색창을 들어가 단어를 입력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린 서로에 대한 빅데이터를 쌓아 나가고 있었지.
너와의 만남을 그려보지 않은 건 아니야. 언젠가는 만나겠지, 카톡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그 결실을 맺어야지, 생각을 내내 하기는 했지. 그런데 뭔가 뜬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해가 바뀌고 메시지의 빈도가 점차 줄어들었음에도 포르투갈로 다시 돌아오는 티켓을 끊었을 때, 드디어, 혹은 어쩌면 너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다른 잡념들 속에서 선명하게 자리 잡았어. 그래서 너한테 말했잖아, 나 이제 곧 돌아가! 느낌표와 웃는 이모티콘을 세 개 붙여서 보냈지.
리스본에 돌아와서 혼자 시간을 보낸 지 보름이 다 되어가던 어느 오후, 네가 보낸 메시지로 핸드폰이 핑 하는 소리를 냈어. 이틀에 한 번씩 러닝을 나간다는 내 메시지에 언제 한번 만나서 공원을 걷자는 답신. 널 만나기 위한 좋은 핑계거리가 필요했어, 사회적 거리는 지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 바로 뒤이어지는 메시지는 궁색하면서도 귀여운 변명들이었어.
분명 네가 먼저 만나자고 운을 떼지 않았더라면 내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일은 결단코 없었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지, 왜냐면 너의 제안에 당장 내일은 어떻냐고 받아 쳤던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어찌 됐건 우린 그 날 공원의 왼쪽에서 세 번째 벤치에서 만났고, 난 널 약 십분 정도 기다렸어.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던 넌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난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어. 그 십 분 동안 나도 열심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거든.
널 만난 건 내가 리스본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가졌던 제대로 된 소통이었어. 다른 인간과 소통하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어진 날들이 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우린 텅 빈 거리와 블라인드를 모조리 쳐버린 가게들을 지나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했어.
조잘조잘 말을 이어 나가는 너의 유쾌함 덕분에 점차 편안함을 느꼈고, 한 마디씩 곁들이거나 반응을 보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어. 네가 물음을 던지고 내 답을 듣느라 두 눈을 마주쳐올 때 난 정말 숨고 싶었어. 너의 어두운 두 눈동자는 지나치게 깊었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감겨오는 긴 속눈썹은 너무 짙었거든.
짧게 호흡을 끊어가며 대답을 이어 나가면 한참이 걸렸는데 넌 그래도 참을성 있게 날 기다려줘서 고맙기도 했지만 부끄러움은 쉽사리 줄지는 않더라. 한국에서의 시간이 어땠는지, 내가 한국에서 보내던 전반적인 생활 모습을 궁금해하던 너에게 난 똑같은 걸 묻고 싶었어.
넌 이 곳, 리스본에서 홀로 보낸 시간은 어땠는지. 네가 찾고 있던 고국의 음료수를 리스본 시내 상점에서 찾을 수 있었는지. 매달 플랫 메이트를 떠나 보내 결국 두 명 밖에 남지 않은 집이 조금 쓸쓸하지는 않은 지. 가끔 내가 스스로 제어 장치를 누르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기척을 알아채고 한 번 더 고개를 들어주는 너의 모습이 좋았어. 그런 작고 소소한 순간들이 모여 시간이 움직였고, 우린 밤이 다 되어서야 포옹을 나누고 헤어졌어. 너와 작별 인사를 나누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스치듯이 했어. 집에 돌아온 뒤에도 너의 목 언저리에서부터 은은하게 나는 시원한 향은 오래도록 생각이 나더라고.
나는 널 보면 좋고, 설레는 마음이 들어. 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고, 너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으면 해. 3차원에 사는 우리는 같은 시간의 속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던 너의 얘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이라면 시간의 길이를 덧붙여 우리가 더 오래 같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 분명히 너에게 그대로 말하면 느끼한 소리를 한다며 놀림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줄까 봐 속으로 삼키기는 했지.
난 아마 여름이면 이 곳을 떠날 거야. 네가 그 얘기를 먼저 언급했을 때 나는 지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잖아, 말고는 해 줄 말이 없었어. 우리 관계를 옅은 안개처럼 휘감은 불안감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다만, 우리가 시간의 연속선 상에서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면 되도록이면 천천히 발을 내디뎌 그동안 좋은 수를 찾아야 한다는 것뿐이지.
그래서 내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라 내일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자는 거야. 어차피 바깥에는 사람도 없고, 일기예보 보니까 내일도 어제랑 다를 바 없이 비가 올 거야. 그러니까 집에서 크림 파스타나 해 먹자. 베이컨을 넣어서 만들어 먹는 좋은 레시피를 내가 찾아 놨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