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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바다, 잿빛 소라껍데기와 노오란 [모래 알갱이]

모래 알갱이

by 이해린

이별 입자는 늘 공기 중에 부유했지만 결국에는 그 조막만한 것들이 모여 이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언제 인가부터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 매일 이별을 연습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7년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은 지금 멀쩡하게 잠을 자고, 월요일에 걸맞은 피곤한 얼굴로 기상해 출근하고, 마른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내가 본 드라마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별 후에 눈물을 흘리거나 후회 속에 피폐해졌다는 말이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걸까, 이토록 다른 현실을 마주하니 오히려 축 가라앉는 슬픔보다는 더 정갈한 형태의 감정을 떠안게 된다. 그 감정이란 게 참 단순하면서도 복잡 미묘해 한 단어로 꼬집어 말할 수도 없으면서 어쩌면 이처럼 깔끔한 이별도 없을 것이라는 자만을 떨게 된다.

헤어짐을 고하던 너는 담담하게 마음을 전했고, 나는 내내 믿지 않았다. 그러다 네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너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내가 너한테 못된 말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원하는 게 다른 것 같아.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는 우리 둘이 함께 있지 않아.”

정작 차가운 말을 내뱉는 건 너면서. 이별을 고하는 건 너면서. 마지못해 끄덕이는 날 보면서도 말을 꾸역꾸역 이어 나가는 것까지도, 다 너면서 말이다.

알겠다, 그럼 이게 마지막 전화인 거냐,라고 묻는 말에 넌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끝까지 네가 날 붙잡아주길 바라는 얄팍한 마음도 기댈 곳이 없어졌다.

“난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따뜻한 사람이었어.”

“너도. 준비하는 일 다 잘 됐으면 좋겠고,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새해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면 소원을 비는 연인처럼 우린 참 다정하게도 이별했다.


다음 날, 버스를 타며 신나는 노래를 틀어도 신이 나지 않았다. 귀만 시끄러웠다. 그래서 플레이리스트에서 한창 빠져 들었던 노래를 틀었다. 앨범 아트가 전체 화면으로 떠올랐다. 작은 화면은 오렌지로 가득 찼다. 베이스 선율, 드럼 비트와 함께 노래가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별 청승이 시작되는 것일까,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굳게 먹는다. 절대, 결단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먼저 연락을 하면 안 된다고.


너를 마지막으로 본 건 8월 26일. 이스탄불 공항에서였다. 우린 서로를 붙잡고 많이 울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다 가도 비행시간 때문에 시계를 여러 번 확인해야 했다. 그때마다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보고 조급함이 밀려드는 바람에 울음은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우리의 작별은 매번 공항에서 이루어졌다. 다음이 있는 걸 알면서도 울음은 한 번 시작하면 쉽게 멎지 않았다. 그렇게 매번 마지막인 것처럼 울면서도 해가 넘어가면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로의 품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잠시의 작별인 줄로만 알았다. 결국 마지막 인사가 된 셈이다.

7년의 만남 중 우린 과연 얼마의 시간을 함께 살갗을 맞대어 보냈을까? 조각난 시간을 이어 붙이면 어디까지 닿을까? 우리의 시간은 많은 부분이 영상 통화와 디엠으로 채워졌다. 아주 큰 여백을 어떻게든 메우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정해진 취침과 기상 시각이 있음에도 가끔씩은 자정을 넘겨 통화할 때도 더러 있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싸우기도 자주 싸웠다. 화해의 손을 내미는 건 주로 너였다. 정확히는 매번 너였다.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 먼저 최후통첩을 던져놓고 이번에도 사과를 기다리는 나에게 사과 대신 이별의 말이 돌아왔다. 적어도 이제는 더 이상 서로의 마음을 할퀼 일은 없겠다는 것에 일말의 위안을 삼았다.

너의 많은 것이 좋았던 만큼, 많은 것이 싫었다. 내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처럼 너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는 고민이 깊어졌다. 여태 너에 대해 가졌던 불만은 사실 의구심이 아닐까. 너와 난 어쩌면 아귀가 잘 안 맞는 문짝이어서 닫히지 않고 벌어진 틈을 타고 언제든 우리 사이에 비바람이 들이칠 수 있는 것 아닌가.

너의 현실과 나의 현실 사이에 놓인 괴리감. 너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 네 이상과 내 이상이 일궈내는 불협 화음. 불안감이 비집고 머릿속을 헤집을 때마다 난 우리 둘이 함께 들고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난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한다. 모든 것의 대전제. 하지만 불변의 대전제가 여전히 존재함에도 이별이 따를 줄이야. 너는 이 대전제가 현재에는 존재하지만 미래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오래도록 고민한 것 같았다.

그 고민은 너만의 것은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향해 가진 감정의 유효성이 언제까지, 또 어디까지 우리의 현재를 지탱해 줄 수 있을지 생각했었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분명해 보이는 것도 점차 태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미래를 생각하는 걸 관뒀다. 달리 말해, 미래에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너의 말이 곧 내가 이미 쫓았던 생각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옳다. 나 또한 옳다. 우리의 이별은 옳음직하다.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별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집었을 때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경우의 수도 수두룩하겠지만, 23년 여름이 저무는 지금 너와 난 이별을 고했다.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그리고 7년 전 우리에게도.

보고 싶다. 아마 그런 것도 같다. 여전히 핸드폰 배경 화면이 6살 때 바다에서 튜브를 헤엄치던 너인 데다 앨범에 아직도 네가 너무 많아 보기야 쉽다. 그런데 이제 어차피 널 못 볼 테니까 사진도 지울 거고, 배경 화면도 바꿀 거다. 흔적을 하나씩 정리해 나갈 거다. 너는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됐으니 더 이상 눈에 보이거나 들리거나 만져지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떠올리면 네 목소리쯤이야 들리고, 네 얼굴도 쉽게 그려지니까 말이다.

이별에는 정도가 없다더니 뭘 어떻게 해도 이만큼의 슬픔과 아쉬움은 남겼을 것 같다. 그나마 이만큼 밖에 안되니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가. 밥도 잘 먹고, 일도 잘 다니고, 재밌는 거 보면 웃고, 야구 스코어는 여전히 궁금하고, 기대되는 이벤트도 있으니까. 그래도 헛헛하다. 뭘 먹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할 사람이, 한화 순위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 사람이, 가족의 근황을 알려줄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아, 이 공허함은 어떻게 메울까? 9시간의 시차도, 대륙과 바다를 건너는 거리도 내가 느끼는 공허함에 비해선 작게 느껴진다.


그 겨울, 널 처음 만났던 공원의 꼭대기에 놓인 세 번째 벤치를 언젠가는 다시 가볼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함께 걸었던 강가와 그 위로 잔잔히 넘어가는 석양을 볼 수도 있다. 다만 그때는 너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온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으면 좋겠다. 우린 응당 행복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평범하게 만나 평범한 연애를 하고 평범한 이별을 하는 거다. 이 터무니없이 평범한 여정이 놀랍게도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진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이 너여서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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