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란
언제나 너의 두 눈을 마주하는 건 내 소소한 기쁨이다. 너무나 유치하고 뻔한 소리로 들리지만 너의 두 눈은 호수보다 깊고 맑아서 난 너의 두 눈에 퐁당 빠지고 싶었다, 어느 시의 구절처럼 노 저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싶었다.
고등학교 1학년 문학 시간에 그 여자네 집이라는 작품을 교과서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눈이 가득 오는 날이면 눈송이가 촉촉하게 내려앉는다는 그 여자의 긴 속눈썹. 너의 깜박이는 그 눈도 그러하다. 긴 속눈썹에 얹힌 잿빛 그림자와 눈동자에 비쳐오는 내 모습은 까마득하다.
그러면 난 가만가만히 숨죽여 그 모습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너를 부르고 싶어만 진다. 가끔 움푹 들어간 너의 두 눈이 그리는 호선을 검지 끝으로 따라 그릴 때가 있다. 네가 자고 있을 때, 잠자코 눈을 감는 그 새를 틈타 도둑처럼 너의 그늘에 담긴 속눈썹을 쓸어내린다.
호기심이 많은 너는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나 마트에서 크림치즈를 고를 때, 공원에서 갈래길을 맞닥뜨렸을 때에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살핀다. 처음 다니는 길도 아니고, 장바구니 리스트에 적혀있는 크림치즈를 살 것인 데다가, 갈래길에선 어차피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릴 거면서 그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조심스럽게 시선을 움직인다. 신중함이 한 꺼풀 내려앉은 너의 두 눈은 그럴 때마다 반짝거리며 빛난다.
무언가를 골똘히 관찰하거나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에도 그렇다. 네가 흥미로워하는 기사거리를 읽거나 몰랐던 것을 새로 배우게 됐을 때도 두 눈동자는 매끄러운 빛을 머금는다. 하물며, 과자의 영양정보 표를 살필 때 마저도.
잔잔한 바람에 옅게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의문이 일렁이고는 한다, 작지만 확실하게. 네가 보는 세상은 어떨까. 어쩌면 그리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 어떤 이유로든지 이따금씩 너의 두 눈이 고통으로 물들어가면 난처해진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다른 친구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제 것처럼 여기는 너는 짊어지지 않아도 될 감정을 마치 제 이름이 적혀 있는 물건인 것처럼 가져가 버릴 때가 있다.
며칠 전 우는 너의 품을 파고들어 한참을 토닥이던 오후가 있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은 너는 조금은 빠르게 숨을 몰아쉬었고, 눈꼬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작은 홈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 탓에 너의 눈물이 고스란히 이불보에 떨어져 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넌 두 손을 모아 가슴 위에 모로 얹어놓은 채 요지부동이었기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 결 대로 이불보에 진하게 번져 나갔다.
너는 울고 싶은 날에는 내 몸에 눈물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운다고 했다. 그래야 눈물방울 속에 모습을 숨긴 슬픔이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그렇게 하늘이 맑았던 그 날 오후, 넌 눈물을 아낌없이 흘렸다.
그런가 하면 너의 두 눈이 나를 담아낼 때가 있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다 못해 너의 두 눈에 나 뿐이 비치지 않을 적이면 뒷목의 잔털까지 쭈뼛 서 버린다. 그 고요한 그 순간은 영원보다도 긴 눈 맞춤, 나는 먼저 고개를 돌린다.
네가 보는 세상에는 나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 가끔은 어색하리 만치 믿기지 않는다. 촘촘하게 난 속눈썹과 그 아래 그늘진 음영. 어두운 두 눈은 나를 향한다. 어둠 속에서도 너의 시선이 내려앉으면 부름처럼 느껴지고, 난 이내 응답한다. 모든 동작과 움직임이 느릿한 나여도 너의 눈짓이 주는 신호에는 제법 민첩하게 반응한다. 응, 왜? 나 불렀어? 무슨 일인데, 하고 너의 시선이 열어준 대화에 들뜬 마음으로 참여한다.
네가 언제까지고 날 향해 은근한 시선을 던져줬으면 좋겠다. 차분한 시선으로 내 불안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줬으면 한다. 조금 더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한 비밀스러운 눈짓을 주고받고 싶다. 즐거운 날에는 웃음기 서린 눈매를 잔뜩 접고, 울적한 한 때에는 젖은 눈꼬리와 벌건 눈매를 서로의 손바닥에 있는 가장 따듯한 부분으로 덮어 주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보는 세상에 내가 절대 눈 밖에 나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