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의 연희전문 시절 기숙사 핀슨관 리모델링 프로젝트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序詩)’를 비롯해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순수한 영혼이 주는 감동을 넘어 가슴이 아려 온다. 시인의 짧은 삶이 우리 역사의 비극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124편의 시와 산문, 한 권의 스크랩북, 그리고 소장도서 42권을 남기고 27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추념하는 기념관이 서울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내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윤동주 기념관은 연희전문 시절 학우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성장했던 기숙사 건물인 핀슨관의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특별하다.
핀슨관은 1922년 기숙사로 지어진, 현존하는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건축물 중 스팀슨 홀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다. 윤동주가 실제 거주했던 장소이자 당시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근대 기숙사 건물로서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지난 2019년 근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를 찾아 100년 된 근대건축물을 세심하게 복원하고 윤동주 기념관으로 재해석해 낸 연세대 건축과 성주은·염상훈 교수와 백양로를 걸었다.
북쪽으로 난 ‘동주의 길’을 따라 백양로 끝까지 가면 야트막한 언덕에 윤동주 시비(詩碑)가 있는 문학동산에 오른다. 철판에 윤동주 시인의 시와 연세대 출신 문인들의 시를 새겨 설치했다. 성 교수는 “1968년 총학생회가 세운 시비는 윤동주를 기리는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너무 권위적인 느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주변과 어울리도록 이번에 새롭게 정비했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의 웃음 목소리가 들리고 까치가 울어대는 길은 윤동주를 향한 그리움의 발길을 따라 윤동주 기념관을 찾아가는 방문객에는 그야말로 훌륭한 건축적 산책로다. 긴 역사를 보여주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난 ‘시인의 길’을 따라 걸어올라 드디어 ‘윤동주 기념관’ 명패를 단 핀슨관에 도착했다. 울창한 숲을 지나온 탓인지 100년의 세월을 머금은 소박한 석조 건물을 보니 마치 윤동주가 다니던 연희전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캠퍼스 부근 안산에서 채취한 암갈색 운모 편암 석재로 마감한 핀슨관은 과거 연희전문 시절 캠퍼스의 맥락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윤동주가 수없이 드나들었을 현관으로 들어가 본다. 아치형으로 돌을 박아 놓은 핀슨관 입구로 들어서면 도서관의 책 정리대에 놓인 유품들을 담은 커다란 사진이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이나 문학관이라면 으레 윤동주의 초상사진 하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다.
“기념관은 2013년 유족들의 유품 기증에서 시작됐습니다. 이어 한 동문의 기부가 있었고, 핀슨관이라는 건축 유산을 활용해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윤동주를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단순한 유품의 나열이 아니라 연구를 바탕으로 재해석된 스토리를 전시하는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염 교수의 설명이다.
다락방을 포함해 3층으로 된 대학 고딕 양식의 핀슨관은 연희전문학교 초창기 캠퍼스를 설계한 머피 앤 다나 건축사무소에 의해 지어졌다. 1917년 마스터플랜 지도에서는 중앙 교사군 북측에 기숙사 8개 동이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2개 동만 건축됐고 그중 한 동이 서쪽 언덕에 자리한 핀슨관이다. 1944년까지 기숙사로 사용되다 1945년 이후 신학관, 음악관, 법인사무처 등 여러 용도로 전용되어 활용됐다. 긴 세월 속에 더해지고 변용된 건물, 도면도 없고 자료도 없는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 윤동주의 문학 유산을 건축적인 공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100년의 역사를 지닌 근대건축물에 쌓인 세월의 켜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새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갈아내고, 빼내는 과정을 통해 공간의 물리적 장치를 최소화하면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공간의 관계를 재구성했습니다.”
성 교수는 “1층은 벽식 구조, 2층은 기둥-보 구조는 현대의 구조 가이드라인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건물이어서 어렵지만 작업 과정이 굉장히 흥미로웠다”면서 “기숙사로 사용될 당시의 소박하고 아늑한 공간감을 살려내고 바닥과 벽 등에 그동안 쌓인 역사의 켜를 드러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얽힌 시간의 중첩을 만들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1938년 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윤동주를 포함해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더불어 생활하고 성장한 핀슨관 1층은 좁은 복도를 따라 기숙사 개별 방이 있었고 남쪽 끝에는 당시 모임을 위한 HR룸으로 사용된 휴게공간이 있었다. 1층은 2인 1실로, 2층과 3층은 오픈형 혹은 개인 실형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윤동주는 3층 다락방과 2층 방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건축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당시의 기숙사 분위기를 현재의 기념관으로 어떻게 이을지를 고민했다는 염 교수는 “긴 세월 동안 변형된 부분이 많았지만 외벽과 창문은 원형이 그대로 유지돼 긴 세월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설계에 기준이 되고, 특히 각 층의 창문들은 설계 과정에서 관람자가 건물을 대하는 시점을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윤동주 기념관은 문학, 역사, 디자인, 전시, 건축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고민과 긴밀한 협업으로 이뤄졌습니다. 모두 윤동주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각오가 대단했지만 한결같이 윤동주 기념관이 과거를 재현하는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기념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기념관 1층은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이를 재해석한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 2층은 그와 후배 문인들의 작품을 모든 라이브러리로, 3층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이벤트를 통해 새로운 창작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각 층의 용도가 다르듯이 공간도 완전히 다르다. 1층의 경우 긴 복도를 중심으로 개별 방들로 구성된 기존 기숙사 복도의 스케일과 감각을 살리면서 중앙 복도 중심의 동선을 외벽 중심으로 역전시켰다. 외벽 안쪽으로 전시벽을 세우고, 건물 외벽과 창을 따라가면서 전시를 보도록 동선을 재구성했다.
외벽 안쪽에 만들어 세운 말끔한 전시벽과 대비되게 외벽의 실내 마감은 100여 년 동안 쌓인 마감 재료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다. 비워내고, 깎아낸 공간에 자리한 긴 시간의 켜가 자연스럽게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러 겹 칠해진 페인트 자국, 벽지가 붙었던 흔적들을 일부러 남겼다. 역사성을 띤 기존의 벽과 새로 만들어진 전시벽에 거리를 두어 과거와 현재가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고 성 교수는 설명했다. 각 방의 전시벽에는 윤동주의 시와 사진 등을 전시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방에 놓인 서랍장에서 꺼내 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실의 좌우 끝 방을 이동하면서 바라본 긴 복도,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정감 어린 분위기를 연출한다. 복도 끝의 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은 계절에 따라 다른 표정을 담는다. 1층 모퉁이에는 기숙사 방에서 격자모양의 창가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두 개다. 원래 위치하던 중앙 계단 외에 북쪽으로 1층 슬래브 일부를 뚫어 계단을 만들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수장고가 보인다. 성 교수는 “원래 법인사무처로 사용될 때 만든 금고인데 긴 변용의 역사를 보여주는 요소여서 굳이 없애지 않고 항온항습 기능을 보완해 ‘보여주는 수장고’ 형태로 바꿨다”고 말했다.
공간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곳은 3층 다락이다. 윤동주가 신입생 시절 생활했던 이곳은 목재 트러스, 기숙사 방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머창(지붕에서 돌출된 창) 등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묘한 감동을 준다. 염 교수는 “3층의 석면 제거작업을 통해 드러난 목재 트러스 천정 구조가 숨어있던 역사의 원형을 드러내며 느낌이 좋은 시적인 공간이 만들어 졌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1학년 가을밤 이곳에서 창밖의 소나무 소리와 달 빛에 집중하며 산문 ‘달을 쏘다’를 창작했다.
3층 전시공간은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살리는데 큰돈을 쾌척한 박은관 동문을 기려 시몬느 홀로 명명했다. 각 층에서 창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방문자와 관계를 맺는다. 3층에서는 창밖으로 윤동주 시비와 문학동산, 캠퍼스에서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의 변화가 한눈에 보인다. 염 교수와 성 교수는 “윤동주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부담이 컸지만 큰 보람을 느낀 프로젝트였다”면서 “1세기 전 지어진 근대 건축물을 직접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건축가로서 너무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