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팀장님에 이어 역대급 면접자를 경험한 뒤로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개이치 않았지만, 오늘은 출근을 해서 자리에 앉아 나도 모르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오늘은 무탈하기를!'
내가 속으로 외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도 모르겠는 내 속을 뒤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선자 씨의 통유리로 되어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었다.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차가운 물 한잔을 들이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책상 옆 굴러다니는 종이컵 하나를 집어 정수기로 향했다. 찬물 한잔을 따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순간, 그녀의 향기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선자 씨였다. 오전 9시 출근인 그녀는 거의 10시가 되어야 출근하는데, 갑자기 출근 시간을 당긴 것인지 모르겠으나 오전 8시 반도 안되었는데 출근을 했다.
"안녕하세요!"
"지연님 나 커피 한잔만~"
나는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뭐 뭐가 웃겨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요! 커피 갔다 드리겠습니다!"
선자 씨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커피 한잔을 외치고 코트를 벗으며 그녀의 유리방으로 들어갔다. 선자 씨는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 처음에도 지연이라고 불렀는데 나 '유지은'의 이름은 온대 간대 없이 지연이라고 계속 부르는 것을 보면 이름을 잘 기억 못 하는 것이 틀림없다.
탕비실에 있는 커피포트기로 커피를 내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대충 눈치껏 순서를 외운 덕에 커피를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포트기에 물을 담아 따르고, 간 원두를 넣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탕비실 옆에는 일자별 당번이 적혀있었다.
1~5 이주림, 8~12 방진희, 15~19 김정화 22~26 유지은
내가 마지막인 것으로 보아 최근 업데이트된 일정 같았다. 오분쯤 기다렸을까 커피가 다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데, 탕비실과 마주한 선자 씨의 유리방 안의 선자 씨가 자꾸 눈을 희번뜩하면서 커피 언제 가져오냐는 듯이 눈을 번뜩번뜩 뜨는 틈에 깜짝 놀라 커피를 하마터면 쏟을 뻔했다.
"네! 지금 다 되었습니다!"
눈짓으로 불호령이라도 받은 마냥 나는 빠르게 종이컵에 뜨거운 커피를 따르고, 선자 씨 방으로 갔다.
"감사해요~나 커피, 아침부터 커피 마셔 나는."
"네. 이사님."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문을 여는 그 순간.
"어머~! 이분 성격 급하시네. 여기 좀 앉아봐요."
선자 씨가 나를 불렀다. 나는 순간 밖으로 나가는 두 다리를 다시 꺾어 선자 씨 방향으로 트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 애써 자연스러운 턴(turn)인 척 앉았지만 낯뜨거웠다.
"커피 마시지. 지연 씨도."
"아. 유지은입니다."
"그래 지은 씨."
선자 씨는 민망한 듯 쌍수한 희 번뜩한 눈으로 윙크를 두 번 내게 날렸다. 이건 미안하다는 뜻인 건가 이해하라는 뜻인 건가 대충 웃으면서 보내는 윙크니까 나는 알아듣는 척 웃었다.
"그래. 우리 회사에 와보니까 어때요?"
"좋은 것 같습니다. 여기 같이 일하시는 분들도 너무 훌륭하고, 영어도 잘하시고 적극적이시고.. 또 친절하시고 너무 좋아요."
나는 사실대로 선자 씨에게 말했다. 물론, 친절(?)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어떤 좀이 좋냐는 그녀의 기대에 찬 두 눈동자를 무시하고 사실만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웃었다.
"하하하 그래요? 누가 누가 친절해~?"
"네?"
"누가 친절하냐고 누구?"
또 선자 씨는 윙크를 하며 내게 말했다. 순간 눈을 피할 뻔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친절해요. 이사님."
"그래요? 아닐 텐데. 정말이에요?"
혀끝에 공기를 빨아들이며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녀가 무얼 알기는 하는 것일 까. 나는 선자 씨가 나의 행방에 전혀 관심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눈치는 있는 상사인 걸까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왔다 갔다 했지만 성격 급한 그녀 앞에서는 말이 길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네! 모두 좋으신대요? 하하."
나는 형식적인 답변을 하고 웃었다.
"그래요. 우리 이제 한 팀이니까 열심히 잘해봅시다. 응원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예~에. 네~에. 감사합니다~. 이제 일 보세요."
선자 씨는 이제 나가봐도 된다는 제스처로 나가보라는 듯이 말을 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선자 씨의 무심함이란, 딱히 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 무심함이 난 오히려 더 좋았다. 선자 씨의 눈에 드는 순간 그녀의 유리방에 갇혀 영영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자 씨의 무심함 속에서 여러 날들을 보내는 동안 나는 제법 이 공간에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순간은 겨우 한 달이 넘었을 때였는데, 코로나가 점점 퍼져 갑자기 회사 권고로 재택을 하거나, 오전 출근을 했다가 코로나 환자 발생으로 인해 급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 팀에도 한 두 명씩 코로나에 걸리기 시작했는데, 우리 팀에서 코로나 걸린 사람들이 재택 혹은 휴가가 이어지면서 선자 씨는 이를 매우 불편해했다. 아니, 불쾌해했다. 특히, 선자 씨가 분노한 인물은 에벌리.
에벌리는 영어를 네이티브로 구사하는 직원으로, 나이는 나와 동갑이다. 같은 동갑내기로 친해질 수 있었지만 딱히, 친해질 점이 없어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다. 그녀의 외모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튀는데,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산처럼 솟아있는 눈썹과 눈매가 더욱 그녀를 날카롭게 보이게 하였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따뜻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다정다감은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오랜 공부를 하고 왔고, 남편도 외국인으로 그녀의 큰 키만큼 다른 사람들보다도 넓은 배포와 아량, 그리고 이해심이 있었다.
그런데 역시, 업무와 인간성은 별 개였나 보다. 그녀는 코로나에 걸렸다는 이유로 업무 관련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선자 씨는 우리의 업무 관련 연락망에 모두 개입되어 있는데, 에벌리가 담당하는 파트너사의 연락망에도 개입되어 있었다. 파트너사의 여러 질문과 컴플레인에도 에벌리가 대꾸하지 않자 선자 씨의 심기가 불편했다.
"재택이 일이냐!?"
갑자기 선자 씨가 인사팀의 채 과장을 불러 항의하기 시작했다.
"재택이 일이냐고! 무슨 코로나가 뭐 얼마나 큰 병이라고 집에서 일을 해!"
채 과장은 선자 씨의 말들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대단한 내공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재택은 무슨 일이야. 집에서 놀고만 있겠지. 이거 봐봐라 답도 안 하는 거. 이게 무슨 담당자라고. 아주 얘 집에서 누워서 자고 있나 봐."
"그러게요.."
선자 씨의 계속되는 항변에 마지못해 채 과장이 대답했다.
30분은 넘게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난 뒤 차분해졌다. 코트를 집어 들고 왼손에는 가방을 들고 고개를 숙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선자 씨가 퇴근했다.
"여러분! 가세요. 집에 가서 근무하시고, 이사님 계신 톡방에 대답 좀 해주세요. 저도 골치 아픕니다. 여러분들이 대답 안 하면 이사님은 일 안 하는 줄 알아요."
선자 씨가 퇴근하자 갑자기 대리가 육성으로 공지사항을 팀원들에게 알렸다.
"hahahaha. She's crazy."
갑자기 내 옆에 있던 진희 씨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희 씨는 이사님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재밌는 사람이라는 듯이 여기는 것 같았다.
"징-"
<공지사항>
재택근무 가이드
1. 재택 시, 컴퓨터로 출근-퇴근 인사 할 것
2. 근무일지 작성하여 제출
3. 이사님 께일일 직접보고
4. 본인 컴퓨터 사용 자제 및 회사 노트북 사용 권장
재택근무의 공지사항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단톡방을 보니 업무를 위한 공지사항보다는 선자 씨를 위한 보고 같았다. 우리가 놀고 있는지, 일을 하는지 알려주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보고였다. 선자 씨가 생각하는 재택은 아무래도 근무 안 하고 누워있는 재택이므로 나는 꼭, 일일 보고를 길게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징-"
카톡창에는 각각의 근무일지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방진희 업무 시작합니다."
"감혜은 업무시작합니다."
"송주림 업무시작합니다."
"이태수 업무시작합니다."
"네. 모두 꼼꼼히 해주세요."
업무 시작을 알리는 카톡 알림에 선자 씨는 마지막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