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rilim Jan 14. 2024

씨알도 안 먹히는 R&R

"여보세요?"

"응. 나야."

"네. 팀장님."

"R&R 메일 봤지? 뭐 질문 있니?"

"아.. 제가 B2C 직영 온라인 말고도, 다른 B2B 거래처들 맡는다고 되어있더라고요."

"응. 맞아."

"그럼 온라인 업무는 저 혼자 다 보고 방진희 씨는 미국 하는 건가요?"

"응."

"근데, 팀장님. 온라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담당이니까 팀장님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이렇게 묶으신 것 같은데 동남아 중에 나누실 거면 저는 태국은 빼고 차라리 필리핀 맡았으면 좋겠어요."

"음.. 왜?"

"제가 태국은 잘 모르는데, 필리핀은 그래도 거기서 살다와서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이나 국가별 특징을 잘 캐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근데, 저희 싱가포르 제가 지금 담당하는 온라인 말고 앞으로 면세점 오픈하실 건가요?"

 "응. 해야지."

 "그건 저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 그럼 너는 뭐 국가 바꾸는 거 말고는 따로 없는 거지?"

 "네."


 그와 전화로 진행한 면담은 나와는 순조로웠다. 다만,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업무들이 무지하게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B2B와 B2C는 성격이 아주 다른 데다가 새롭게 이 회사의 시스템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는 좀 더 나의 성장의 초점을 맞추고 싶기에 받아들였다.  팀장도 우선 바뀐 업무대로 해보고, 또다시 원상태로 바뀔 수 있다는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업무가 더럽게 많지만, 포트폴리오 쌓는다 생각하자.'

 '씨발. 근데 이거를 어떻게 혼자 하라는 거야 미친.'

 '그래. 이거 배우면 다음 이직할 때 좋지 뭐.'

 

  내 마음에서는 폭풍 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어디서 멈출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을 헤매는 것처럼 몸이 이리저리 쏠리다가 잠이 들어야만 잠시 파도가 잔잔해졌다. 


 새벽 6시 30분 눈을 뜨고 일어나,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을 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지만 눈만 감고 있는 상태로 20분을 뻐긴다. 눈을 감고 ‘오늘 연차 쓰고 싶다’를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러다 보면 20분이 지나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겨울엔 추위에 떨며 화장실에 씻으러 들어가고, 더운 여름에는 춥지 않아서 떨지 않고 씻는다.

  새벽에 뜨기도 싫은 눈을 억지로 비비고 일어나, 몰래 쌀을 파먹는 쥐가 걷는 것처럼 화장실로 총총 걸어가 씻는다. 빠르게 3분 컷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나오면 침대에 널브러져 자는 남편이 보인다.

  '좋겠다...'

  "응?"

 "나 아무 말 안 했는데?"

  남편이 갑자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물었다.

신기하게 남편은 몸은 자고 있는데, 항상 시야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마치 속옷이라도 가져가려고 움직이면 그의 얼굴은 나를 향해 따라오고 있고, 내가 화장실 앞에 있는 화장대 앞의 작은 불만 켜면 불 켠 곳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10분 안에 씻고 나와 화장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모르겠는 화장을 한다. BB크림을 한 번에 쭉 손등에 짜서 쿠션 퍼프로 얼굴에 팡팡 바른다. 눈썹은 생명이니까 눈썹을 눈가 뒤로 길게 뺀다. 화장 끝.

  입술은 SRT 기차 안에서 바르면 되니까, 가방을 챙긴다.

  내가 출근 준비를 다 하고, 나가려고 하면 남편은 다시 소리친다.

 "잘 갔다 와. 고생해-!"

 "응. 나 다녀올게!"


  안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한다. 가방에는 아침에 먹을 식량인 바나나 하나를 비닐봉지에 싸고, 어젯밤에 읽던 책 한 권을 가방에 넣는다. 주어진 시간은 20분, 엘리베이터를 호출하자마자 신발을 신어야 한다. 신발을 빠르게 신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를 놓치고 말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놓치면 3분이 더 지나기 때문에 기차 타는 곳까지 전속력으로 뛰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빠른 재촉 걸음으로 20분 만에 SRT 기차 출발지에 다다른다. 에스컬레이터는 지하 6층까지 이어지는데

에스컬레이터 버프를 받아 전속력으로 걸어 내려간다.


  SRT가 보이면 안심하듯 2호차 안으로 들어가 빈 곳에 맨 앞쪽에서 세 번째에 앉는다. 앉아서 감사일기를 핸드폰 노트에 적어본다.


  1. 어제 같이 산책해 준 남편에 감사.

  2. 아침을 챙겨 와 준 나 자신에 감사

  3. 오늘도 출근할 수 있음에 감사

  

 감사일기를 쓰기라도 하면, 약간의 힐링이 된다.

  다음은 어떤 일을 하면 하루가 더 좋을지 적어본다.

  1. 건강식을 먹는다면.

  2.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3. 저녁에 운동을 30분이라도 한다면

  나 스스로에게 주는 미션처럼,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 써내려 간다.

  그다음 어떤 말을 나 자신에게 해줄지 적는다.

  ‘오늘도 긍정적이고 밝은 지은이가 되자.’


  그다음 핸드폰은 가방에 넣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한 줄, 두 줄, 세 줄, 책이 너무 재밌으면 쭉

읽어가고 지루하면 졸기 시작한다. 수서역에 도착하는 것은 7시 58분. 하지만 앉은자리에서 50분에

일어난다. 일어나서 나가는 입구에서 줄을 서서 대기한다. 짧은 10분간의 SRT 좌석은 편하고 매일

아쉽다. 하지만 일어서지 않으면 제일 늦게 내릴 수 있다.

  먼저 줄을 서려는 데 매일 아침마다 만나는 임산부가 먼저 섰다. 아깝다. 그다음 바짝 쫓아가는 중에 맨

앞에 앉아있던 백 팩을 맨 할아버지가 섰다. 나는 세 번째로 줄을 섰다. 다행이다. 복도 칸을 벗어나면 비탈길의 문이 닫히는 경계선에 서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내리기 전 8분 동안 좁은 복도 안에서 어렸을 때 기차놀이를 하듯 서서 간다.

  도착하면 바로 내려서 전속력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나아간다. 매일 아침마다 보는 사람들. 꼭 제일 먼저 내리는 여자 둘은 자매인 건지 사귀는 건지 한 명은 프라다 가방을 메고, 다른 한 명은 비슷한 까만 가방을 메고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그들은 제일 빠르다.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401번 버스를 빠르게 탈 수 있다.

지하철 입구와 출구에서 그 애들과 멀어지고,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올라간다. 운이 좋았다. 

  버스가 4분 후면 도착이다. 항상 아침마다 보이는 다른 임산부가 있는데, 안 보이는 걸 보니 오늘은 연차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40분간은 지나야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버스를 타는 40분은 책 읽는 시간으로 보낸다.

개학을 했는지, 남학생들이 정류장에서 많이 탄다. 


주변 사람들은 신경이 안 쓰이는지 학생들은 저마다의 배가 뚱뚱한 가방으로 나의 어깨를 친다. 앉아서 책을 읽는 대도 가방으로 밀어대다니. 질 수없다. 옆에 창가에 바짝 붙어 혼신의 힘으로 책에 집중해 본다. 8시 40분 정거장에서 내린다. 내리자마자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어 냅다 뛰어간다. 바로 보이는 빌딩.


  회사에 도착한 순간, 나는 뇌를 잠시 꺼둔다.

  “안녕하세요.”

  동료들에게 짧은 인사 후,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메일을 보아하니 오늘도 업무가 많다. 시간이 생명인데..


  개인 톡이 동료로부터 왔다.

  “지은님. 괜찮아요?"

  "네?"

  "아니. 그냥 업무가 많아 보여서."

  "진희님은 어때요?"

  "뭐. 팀장이 하라면 해야 하죠 뭐."

  "아.."

  "점심 나가서 먹어요 우리."

  "네"

  

  오전 중에는 업무를 하느라 바빠서 빌런들의 점심을 뭐먹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도로 바빠서 그들을 신경 여유조차 없었다. 진희 씨가 오늘은 왠지 할 말이 있는 건지 나를 불러 같이 먹자고 해서 코엑스로 왔다.


  "Hey,~"

  "Why?"

  "You look pretty sad."

  "It's okay."

  진희 씨는 네이티브라서 영어가 더 편한 사람이다. 나도 뭐 영어를 전공해서 어느 정도 말하고 듣고는 하지만 진희 씨만큼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건 아마도 하고 싶지 않은 올림채를 쓰지 않아서 좋을 뿐...


  "Anyway, I heard you take almost all of Asia sales work, right?"

  네가 아시아 일 다하는 것 같던데?

  "Hmm. Well. I don't know."

  몰라.

  "Can you handle this?"

 할 수 있겠어? 

 "Maybe."

  모르지.

  "I think he's super stupid and doesn't really know our work to be."

  문 팀장 개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멍청해.

  "Honestly, I am just doing what he wants to do. And for now, I don't want to lift up my voice against him. I am so tired of it."

  솔직히, 나 그냥 개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뿐야. 반대 의견내서 싸우고 싶지 않아. 피곤해.

  "Oh.. Okay"

  알았어.


  진희 씨는 내가 걱정이 된 것 같았지만 나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력직으로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물론,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준다. 그러나 문 팀장의 만행으로 봐서는 말해봤자 서로 날만 새우고 얼굴을 붉힐 것이 분명해 보이기에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사진: UnsplashNagesh Badu




이전 12화 전쟁 같은 아침(feat. 직장인에게 월요일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