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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메리 Jul 27. 2021

나무. 길. 은하수.

<식물은 알고 있다>를 쓴 대니얼 샤모비츠가 말하길, 식물은 볼 수 있고 냄새를 맡고 촉감을 느낄 수 있으며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 이 책은 8년 전, 내가 갓 스무 살이 됐을 때 출간되었다. 당시 대니얼이 말하는 식물에 관한 이 사실이 꽤나 충격이라, 지금도 식물을 바라볼 때면 늘 떠오른다. 식물은 뇌가 없어도 인간처럼 살아간다는 것. 내게 짓밟힌 모든 잡초 따위가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다는 것.  



강진 라이프를 이어간 지 어느덧 2주일이 흘렀다. 친구에게 가끔 전화가 올 때면 친구가 묻는다. 너 대단하다, 어떻게 그 산속에 혼자서 살 수가 있어? 안 외로워? 응 안 외로워. 처음엔 나도 왜 안 외로운지 몰랐다. 이 광활한 대지 위, 최소 반경 수십 킬로미터 이내에는 인간이 남긴 흔적도 없는 이 산속에 강아지만 곁에 있는데—가끔은 그 강아지마저 둘째 언니가 모시고감—, 어째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지. 그런데 이제 알 것 같다.



그건 바로, 나무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셀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고 냄새를 맡고 촉감을 느끼며 과거를 기억하는 존재인 나무 수천 그루가 귀가 멍해질 정도로 내게 속삭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 이유다. 내가 매일 수천 그루를 마주한다는 것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 가득한 체육관에서 함께 바글바글 있는 것과 비슷하다. 외로울 틈이 없다. 적어도 나무가 들을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아는 이상, 이럴 수 있는 거다.


아침 풍경, 첫 눈길은 나무에게


매일 아침 출근 전과 매일 저녁 퇴근 후 나무에게 말을 건다. 종종 나무도 내게 말을 해줬으면, 자연의 언어 말고 그냥 한국어로 말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너비로 따졌을 때 최소 1백 년 이상은 된 것처럼 보이는 늙은 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이 나무들이 그간 이곳에서 보고 느꼈을 것들, 그들이 자신의 뿌리와 가지 마디마디, 피우고 돋아낸 모든 잎새에 새겼을 그 기억이 궁금하다.



때로는 나무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태풍이 심하거나 번개가 칠 때면 나무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비가 오는 날은 나무가 이 찜통더위를 그나마 버틸 거란 생각에 안도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축사를 올라갈 때 뿌리째 뽑혀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에 뽑혀 이미 속이 텅 비어진 나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아빠가 회복해서 돌아왔을 때 나무를 베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흑염소들도 어디에다가 팔지 말고 계속 키웠으면 한다. 이건 내 욕심이겠지. 그래도 그랬으면 한다. 이 나무와 동물이 이곳에 오랫동안 안전하면 좋겠다.



축사 가는 길에 있는 울창한 숲


2주 전, 급하게 짐을 싸고 강진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을 때, 나는 내 인생이 후진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전에도 아우토반 위 세단처럼 훌륭하게 질주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 길을 잘 걷고 있다고 자부했다. 피할 건 피하고 배울 건 배워가면서 차곡차곡 내 세계를 쌓고 있다고.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가족들이 동시에 아프자 자진하여 목포로, 강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잠깐 쉬는 거라고 생각하자. 지금은 내 길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이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더는 달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인생에 한 번쯤 깊게 파묻혀볼 법한 대자연이다. 나는 이곳에 와있고 이곳은 내가 숱한 사람들에게 치였던 지난 생활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깊은 무언가가 있는 곳이다. 오랫동안 나무와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순간 드는 감정과 생각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울컥함을 준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 바람에 흔들리는 이 나무들과 매일을 허덕이는 벌레와 부르짖는 동물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나 또한 결국. 이 자연의 순리대로 태어났고 머지않아 사라질 존재라는 생각. 우주 속에 떠도는 먼지의 일부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일 거라는 생각. 그것들이 모여서 이 땅을 만들고 지금 바라보는 하늘을 만들 거란 생각.


 

생애 첫 본 은하수, 아이폰11의 한계, 구름같지만 깨알같은 것들이 빛났다.


오늘도 쉬는 날이었다. 아픈 조카가 입원해있는 병원에 다녀왔다. 이제는 질릴 대로 질려버린 병원 공기로부터 도망 나오듯이 뛰쳐나왔다.  가쁘게 밟아 강진에 있는 집에 왔다. 차에서 내리자 왠지 하늘이 빛났다. 하늘 위에는 풀벌레 울음소리에 맞춰 음영을 조절하는 별들이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수놓은 반짝임이 강줄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은하수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은하수를 보았다. 숨이 멎었다. 나도 저렇게 흐르고 있겠지. 우리 조카도 아빠도 언니들도 그리고 엄마도 저렇게 아름답게 흐르고 있겠지.


오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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