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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Nov 08. 2023

바이커들의 놀이터_Handlebar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매력이 넘치는 공간

남편이 친구들을 만난다고 나갔다가 밤 12시가 넘어 늦게 귀가했다. 신발을 벗으며 잔뜩 신난 얼굴로

"나 오늘 완전 쿨한데 다녀왔어. 너무 멋져."

키즈 카페에서 신나게 놀고 와서 엄마에게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할 말이 많은 꼬맹이 같은 얼굴이다.


"잠깐,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야?"

남편에게 나는 뭔가 시골스러운 냄새.

"어디에서 불 피우다 왔어? 뭘 태웠어?"

내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자,

"거 봐. 당신도 냄새만 맡아도 막 들뜨지?"

'뭐래, 이 남자가 취했나.'

"어디를 다녀온 거야? 배 타고 바탐(싱가포르 근처의 인도네시아 섬)이라도 다녀온 거야? 싱가포르에서 이런 냄새나는 데가 없는데."


남편이 묘사를 시작한다.

"와, 완전 무법지대 같은 분위기에 바이커(biker)들의 은신처? 소굴? 뭐 그런 분위기야. 주말에 같이 가자. 당신도 좋아할 거야."


싱가포르에서 멋들어진 오토바이를 탄 바이커들을 본 적이 없다. 오토바이라면 싱가포르로 출퇴근하는 말레이시아인들이 통근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자동차가 비싼 싱가포르에서 자동차 대신으로 사용하는 '생활형 교통수단' 정도로 여긴다. 'Harley Davidson' 한 대 길에서 보지 못했던 때였다.


당시 오토바이를 주문받아 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쇼, American Chopper 시리즈를 즐겨 보던 때라 오토바이 한 대가 자동차보다 훨씬 비쌀 수도 있고 세밀한 디자인과 제작 공정 과정을 거쳐 나온 오토바이는 예술 작품 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뭐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선 어떤 음식 파는데?"

"음, 버거나 핫도그. 그런 간단한 거~

상상해 봐. 바이커들이 황량한 도로를 주행하다 잠깐 들러서 엔진도 식히고 배도 채울 수 있는 로드사이드 카페. 딱 그런 모습. 그리고 거기에서 다른 바이커들과 정보 교환하고. 그런 상남자들의 공간."


남편이 10대 후반에 오토바이 운전면허를 취득하겠다고 해서 속을 많이 썩였다는 말씀을 어머님께서 하셨던 적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오토바이는 안 된다고 극구 반대하셔서 지금도 남편은 오토바이 면허증이 없다.

'설마, 이제 와서 오토바이 자격증을 따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American Chopper 시리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아.'



Gillman Barracks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영국군 병영. 아름다운 건물들이 모여 있지만 워낙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Gillman Barracks


남편이 바이커들의 소굴을 보여주겠다고 나를 Gillman Barracks으로 끌고 온 날.

"기대해도 좋아. 딴 세상에 온 것 같을 거야."

"그런데 여기 너무 어둡다."

주차를 하고 길을 걸어 내려가는 데 너무 깜깜하다. 혼자는 낮에도 절대 올 것 같지 않은 곳이다.


Handlebar

단층 건물에 딱히 조명이랄 것도 없이 띄엄띄엄 백열등 몇 개 달려 있고. 여기저기 놓인 모기향과 그릴에서 음식이 타면서 뿜는 연기로 매캐하다.

빈 자리에 앉아 몇 가지 되지 않는 음식 메뉴를 훑어 보고 있었다.

"웅웅, 부르릉 부르릉." 

귀가 떨어지게 큰 소리를 내며 바이커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차는 주차하지 못하지만 바이커들에겐 주차할 장소도 세차할 장소도 마련되어 다.

바이커들이 들어오면서 어둡던 공간이 눈부시게 밝은 헤드라이트로 환해졌다.


'으아악, 그런데... 저건 뭐야?'

은 빛으로 비춰진 실내 공간 한쪽에 얇은 트렁크 팬티 한 장 입고 문신으로 덮인 상체와 하체를 드러낸 남자가 서 있다. 헤드라이트에 눈이 부셔 잘못 봤나 싶어, 찡그리며 봐도 끔뻑거리며 봐도. 분명 사람이다.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린 실키한 사각팬티만 입은 남자.


"Wow, Cool~ Awesome!"

남편은 일렬로 들어와 정렬로 주차하는 바이커들을 보며 감탄을 한다.

"저기 이상한 사람 있어. 옷 홀라당 벗고 빤스만 입고, 몸 전체 다 문신이야. 저기~ 긴 머리 뒤로 묶고 물 호스 들고 있는 사람."

"아. 저 사람이 여기 주인이야."

"뭐? 주인? 그런데 옷은 왜 벗고 있어?"

"세차하느라 더워서 그렇겠지."

핸들바를 여러 번 갔지만 주인이 옷을 제대로 입은 걸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이상하더니 빤스만 입고 오토바이 세차를 하건 테이블로 냅킨을 갖다 주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됐다.


사방이 어둡고, 모기도 많고 야생 쥐도 있을 것 같은 곳에서 도대체 뭘 먹어야 하나.

맥도널드 보다 조금 더 비싼 값에 파는 저렴한 값의 버거와 프렌치프라이가 카페테리아 식판에 담겨 나왔다. 어두워서 입으로 모기가 들어가는 지 파리가 들어가는 지 맛도 모른 채 먹었.


이 곳의 첫 느낌은 장소도, 사람들도, 음식도 거칠었다.

지극히 규격화된 사회에서 잠시라도 일탈(脫)을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라는 점은 특별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탈의 공간'이 꽃미남에게 없는 상남자의 매력처럼 홀린 듯 끌렸다. 한 주를 시작하기 전, 일요일 저녁에 플라스틱 식판에 나오는 싸구려 버거 하나 먹으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사람들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걸 잊게 해 주는 마력이 있었다.


2012년 싱가포르 정부는 세계적인 갤러리들을 밀집시켜 미술의 허브로 키워나가겠다는 계획으로 Gillman Barracks 지역의 레노베이션을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과 같은 이 곳의 매력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공사 기간 동안 쫓겨난? Handlebar가 공사 후에 이곳에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야심찬 싱가포르 정부의 계획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 쪽으로 끌어 오지는 못했. 세계적으로 유명한 갤러리와 팬시한 카페들이 입점했지만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여전히 정적이 흐른다. 이 곳의 새로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Handlebar는 다시 오픈했고 아이러니하게 전보다 규모가 몇 배로 커지고 고객층도 다양해졌다. 어린아이들부터 애완동물까지 가족들의 놀이터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바이커들이 온순해진 모습으로 변한 건 절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습 그대로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어울려 먹고 마시고 음악 듣고 떠들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해 준 Handlebar는 올해로 24주년을 맞았다.


사진 출처: Handle Bar Face Book

Handlebar Singapore at Gillman Barracks | Singapore Singapore | Facebook


10 Lock Road, Singapore, Singapore


Monday. CLOSED

Tuesday ~ Sunday. 12:00 -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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