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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16. 2018

신혼부부는 왜 변기 때문에 싸울까

숙제와 청소는 인과 관계가 아닙니다

(나도 그랬지만) 초등학생인 아들은 숙제를 미리 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숙제를 전혀 안 하길래 1학년은 숙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침 독서 시간마다 교실에서 했단다. 2학년이 된 후로는 스마트폰에 깐 어플로 알림장이 오기 때문에 그날그날 숙제를 미리 확인하는데 양이 많진 않아도 보통 월요일에 가져가야 할 숙제가 꼭 있어서 일요일 밤이면 전쟁을 한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그 많은 시간 동안 숙제를 하지 않다가 꼭 일요일 저녁이 되면 숙제 때문에 한숨을 쉬는 아이. 졸린 눈을 비비며 애써 책상에 앉은 아이에게 그냥 숙제를 안 해가면 안 되냐고 물으니 왕, 하고 울어버린다. 이유인즉 숙제를 안 해가면 ‘청소’를 하기 때문이란다. 그렇군. 우리 때도 청소를 했었지. 맞거나 청소하거나. 가만, 근데 숙제를 안 한 거랑 청소랑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숙제를 안 하면 청소를 시키는 거지?

     

독서록을 쓰기 위해 세 권의 책을 몰아서 읽는 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숙제는 학습의 연장인데 그 숙제를 안 하면 남아서 마치도록 지도를 해야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이 청소를 싫어하는 건 단순히 청소가 싫어서일까? 혹시 벌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인 건 아닐까? 청소가 벌칙이 되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청소는 좋은 이미지일 수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가정에서 청소를 하는 이는 정해져있다. 엄마가 방청소를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운동화를 빨아준 집이라면 그 집의 아이는 가사노동을 해본 적이 없다. 학원 다니느라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한 아이에게 누구도 청소를 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된다고 갑자기 청소를 잘하게 될까? 결혼해서 가사 노동을 분담하게 될 때, 변기는 누가 닦을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리고 미디어는 이런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연화시키고 있다.

     

집안일에 대해 ‘돕는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집안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숙제를 안 하거나 공부를 못하는 이가 청소를 한다는 당위성은 어떻게 부여되는가. 공부를 못하면 힘든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나 어릴 때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집안일을 전담하는 엄마 또는 그런 역할을 해주는 가사도우미나 할머니 등의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청소를 하찮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귀찮은 일로 인지한다. 은연중에 자신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주위 어른들이 여기에 확신을 심어 준다.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위치, 노동자의 위계 중에서도 가사노동자의 지위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존중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나.

     

퇴근도 없고 휴일도 없는 일이 가사노동이다. 오늘 할 설거지를 내일로 미룰 뿐 그 설거지 어차피 내가 한다.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다.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구성원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 청소를 포함한 가사노동이다. 보수도 지불하지 않은 채 특정 가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하도록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어쩌면 숙제를 안 하면 청소를 시키는 학교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읽은 세 권의 책으로 독서록 노트를 채운 아이가 이제 겨우 잠이 든다. 저러라고 내준 숙제도 아닐 것이고, 한달쯤 지난 후에 물어보면 책 제목도 내용도 까맣게 잊었을 텐데 서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독서 습관은 중요하다. 하지만 독서 습관만 중요한 건 아니다. 숙제와 청소가 서로 아무 상관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 숙제는 선택이지만 청소는 의무가 되길 바란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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