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Oct 19. 2020

화려하든 무지하든, 아무튼 껍데기

연극<심사>의 제목은 왜 <아라베스크>로 바뀌었을까

코로나로 비대면 상황이 지속되면서 2020년 가장 큰 타격을 본 곳은 공연계다. 여기에 버금가는 곳이 여행업계지만, 그래서 너무너무 속상하고 슬프지만 일단 오늘은 공연에 대한 이야기니 이것부터 쓰자.


음식업계도 물론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의식주는 어쨌든 사람 사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가. 문화생활 잠깐 안한다고 죽는 게 아니니까 '그깟' 연극, 영화, 음악, 전시 잠깐 멈추면 그만이다. 다만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그 잠시 동안 시름시름 앓으며 고사 위기에 몰리는 것일 뿐. 그러니까 창작자들이 죽어나가는 거지 향유자가 그런 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와중에 교통 불편한 삼일로 창고극장까지 가서 연극을 봤다. 난민연구자로서, 난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말에 3단계 거리두기가 시행되기 전에 어서 빨리 봐야한다는 마음으로 급히 달렸다. 긴긴 코로나 블루를 날려줄 공연, 내게도 뜻깊은 장소 삼일로 창고극장, 그렇게 공간도 내용도 낯선 경험을 하러 설레며 예매를 하고 극장을 찾았다.


벽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고 무대는 난민심사실로 꾸며진 채로 진행되는 연극 <아라베스크>.

말레이시아에서 온 예멘 국적의 무하마드는 말레이시아에 남은 부인을 데려오고 싶어했고 심사관은 서류에 큰 문제가 없으면 난민 비자를 발급해주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무하마드의 신분이 가짜인 게 들통난다. 부인의 여권용 영문명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하마드를 수상히 여긴 계약직 직원의 폭로로 무하마드는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이다. 실체는 없고 서류만 난무한 심사관실. 본국에서 탈출할 때부터 자신이 난민비호국에 입국하면 제출할 서류를 소중히 품에 껴안은 채 나온 자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서류'가 있어야 한다. 이 종이 한 장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누가 난민인가, 아니 누가 난민이어야 하는가.


공교롭게도 이 극에는 '종이 한 장'이 필요한 또 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랍어를 전공했고 제주도에서 난민심사보조원으로 일하며 '가짜 난민'을 잡아낸 이 유능한 계약 직원 말이다. 이제 계약이 만료된 이 남자는 함께 일했던 심사관의 추천서를 받지 못해 그대로 실직자가 되고 만다. 서운하다고 생떼를 써봐도 할 수 없다. 추천서를 써주고 말고는 심사관의 재량이다. 아랍어를 할 수 있지만 유학파는 아닌, 그래서 난민심사관이 아니면 도대체가 쓸모가 없는 것 같은 이 남자의 능력은 딱 취업적격자와 부적격자 사이의 '경계'에 있다. 그는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아랍권에서 몇년 간 생활을 했다는 다른 직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게 된다. 자리는 결국 서류를 가진 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난민 인정은 거주하던 곳에서 더이상 거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의 신분을 증명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들을 이런 시스템으로 내몬 자들이 있고 그들이 난민법을 만들었다. 국적, 인종, 종교, 특정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라는 다섯 가지 사유로 거주지를 떠난 이들만을 국제법에서 난민으로 인정한다. 조금이라도 경제적 이유가 있다거나 본국에서 무력활동을 했거나 환경 재난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자발적인 이주를 선택했다면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난민 지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중동과 아프리카, 구 러시아 연방국가들, 아시아권에 속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들에서 비행기를 타고 섬이나 다름없는 한국으로 입국한 '난민신청자'들은 모두 강대국들의 식민지를 겪는 동안 종족 갈등으로 분열됐거나 두 번의 세계 대전 속에서 삶의 기반을 잃고 회복되지 못한 이들이다. 그런 나라들에게 여전히 무기를 팔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유엔을 통해 난민법을 만든 강대국들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국산 무기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중동의 무장단체들에게 제공되며 그렇게 번 돈으로 군수산업체인 국내 유수 기업들은 한국의 주주들에게 매년 풍족한 배당금을 지급한다.


먹고 사는 일이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떠난다. '더 나은' 곳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난민캠프의 생활보다 나은, 폐허가 된 고향보다 나은,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 몰라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들은 전재산을, 자신의 몸을, 남은 가족을 브로커에게 맡긴다. 우리가 이들과 다른 점은 그냥 '거기'가 아닌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우연 하나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난민법을 만들고 출입국법을 강화하며 국경을 통제하는 합리적인(?) 이유다.


2018년에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예멘 난민 사태'. 이를 사태라고 이르며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난민 반대' 열풍이 불었었다. 연극 <아라베스크>는 이중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서사를 진행한다. 이 난민이 진짜 난민인지를 묻는 '가짜 증명서'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며 진짜 난민의 조건을 묻는,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도발적이고 위험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유독 서류에 집착하는 이들. 대표적인 관료주의로 일관된 한국의 난민수용 체계는 세계 꼴찌의 난민인정률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서류가 미비하니까, 증명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모르니까 우리를 납득시켜라. 관료들만의 관행일까? 당연히 아니다. 이런 식으로 낯선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시스템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여기'에 우연히 태어난 선주민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을 너무나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관료들의 충실한 사명감이다.


연극 <아라베스크>가 초연될 당시 제목은 <심사>였다. 이 간결하고 압축적인 제목은 대중들에게 오픈될 때 '아라베스크'로 바뀐다. 이슬람에 대해 무지한 우리는 '아라베스크'에서 무엇을 떠올릴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양의 건축물? 그 상상이 불러일으키는 낯설고 이국적인 정취? 이 작품의 제목에서 뒤늦게 현타가 왔던 이유는 아라베스크가 표상하는 이 거리감과 폐쇄성이 난민 심사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랍 문화의 아름다운 이 문양, 정교하게 반복된 알라를 향한 숭고한 마음의 표상과는 상관없이 그저 '예뻐 보이는' 아라베스크를 소비하는 우리의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처세 말이다.


10월 30일, 대학로에서 다시 한 번 연극 <아라베스크>의 막이 오른다. 난민법에서 정한 난민의 범위가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해졌던 것은 이미 70년 전 과거이다. 반백년도 더 지난 그 한계로 인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서류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빈손에 쥔 절망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기초적인 물음 하나. 아이폰 들고 나이키 신고 비행기 타고 온 난민은 난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한번이라도 지진을 겪어본 이들은 알 텐데. 지진 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게 핸드폰이라는 걸. 그 안에 모든 게 들어있는 건 아프리카나 중동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그 나라 국경에는 이미 탈출한 이들의 수백, 수천배의 숫자로 '난민 캠프' 내에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내는 진짜  난민들이 있다.


 보려고 하지 않을 뿐, 없는 게 아니다.

이전 10화 민족 없는 국가 vs. 국가 없는 민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