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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pr 13. 2020

결혼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요

숨겨진 두려움과 불안을 투사한 이미지에 대한 거부는 정당하다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이주민 관련 프로그램을 모니터한 지 8년째다.


한국은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2012년 처음으로 다문화 수용성 지수를 측정했는데, 결과에 앞서 이 조사를 실시하게 된 배경이 중요하다. 한국은 다문화국가일까? 아니, 다민족국가일까? 아니다. 이런 질문은 이미 의미가 없다. 한국인의 다문화 수용성 지수를 알아보려고 했다는 것은 이미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들어섰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현상은 벌어졌는데 이에 대한 객관적 지표가 있어야 후속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 시작된 작업이 다문화 수용성 지수 측정이었고 이후로 3년마다 실시하고 있다. (2012년 51.17점에서 2015년 53.95점, 가장 최근인 2018년 53.95점이다. 부연하면, 세대별로 이주민과의 접촉 빈도별로 세분한 자료는 격차가 크다. 성인보다 청소년이, 해외 경험 없는 사람보다 유경험자가, 다문화 이해 교육을 받은 이들이 당연히 점수가 높다. 바꿔말하면 외국인 만난 경험 없고 꼰대에 가까울수록 다문화수용성이 낮다는 말이다.)


2007년에 국내 거주 이주민이 100만 명이 넘은 이후로 10년만에 두 배를 돌파했다. 그 중 꽤 많은 숫자는 결혼이민자들이다. 그리고 미디어에서는 비가시적인 이주노동자를 제외하고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는 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인 - 결혼이민자를 다룬 프로그램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잘 만들면 좋겠지만.... 경험이 없으니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제작진의 의지(!)가 반영된 일부 프로그램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고 그래서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가이드라인'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이주민 재현 방식에 대한 해외사례와 국내 제작 프로그램의 모니터링 사례 및 개선 방향을 제안하기에 이른다.(제안만 하고 제지를 안하니까 아직까지 계속 문제는 반복된다. 휴....)


그래서 방송쟁이 출신으로 문화연구를 시작했던 나는 얼떨결에 몇 번 관련 프로젝트를 하게 됐는데, 그 때 몰아서 배운 걸로 아직도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이젠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모니터링이 되는 수준이랄까.


2015년에 KBS에서 방송한 <비밀>은 매매혼으로 한국에 입국한 베트남 여성과 글자를 몰라서 소통하지 못햇던 남성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고 대본이 탄탄했는데 단, 모니터링에서 늘 걸리던 클리셰들이 몇 가지 있긴 했다. 그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매매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매매혼은, 다른 말로 하면 중매(仲媒)결혼이다. 가운데서 매개하는 자가 있는 결혼이라는 뜻인데 이 중매인은 예나 지금이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양측을 소개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된 것들을 통해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맞선을 보는 것 자체가 나는 얼마짜리, 너는 얼마짜리, 우리는 동급 이런 전제로 만나게 된다. 수많은 결혼정보업체에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광고해도 결국 등급별로 배우자 연결해준다는 거다. 단지,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사랑은 아니길 바라는 게 보편적인 바람일 뿐이고 실제는 그렇다. (반박하실 분, 존경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ㅠㅠ)


영화 <파이란>을 기억하시는 분? 장백지와 최민식이 주연인 2001년도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는 시선은 다양한데 극적으로 갈리는 부분은 결혼이민자 당사자들과 미학적 평가를 업으로 삼는 평론가의 평가가 정반대라는 부분이 재밌다.  <파이란>의 얼척없음이 <비밀>에도 반복되는데 남자가 무슨 망나니 짓을 하든 여자는 무조건 수용하고 감싸주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감독이 다 남자라서 공감능력이 1도 없나? <파이란>보다 <비밀>의 나은 점은 그나마 <비밀>에서는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음을 암시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는 것 - 목의 화상 상처 때문에 신경쓰는 띠엔을 위해 철주가 스카프를 사오는 씬 - 인데 그래봤자 법적 소유주(남편)에게 헌신하는 캐릭터는 동일하다. 반대의 경우? 있으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딱 하나가 좋아서 사랑하고 딱 하나가 싫어서 헤어지는 그런 게 연애 아닐까. 결혼은 더 많은 걸 따져보고 선택하는 일이며 이혼은 손익계산서에 빵꾸나면 - 재정적이든 감정적이든 - 감행하는 용기다, 적어도 21세기의 한국에서는. 사랑해서 결혼하려면 사랑이 끝나서 이혼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살아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계약인 건 맞고 계약이니까 유무형의 계산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건 매매혼을 해라, 하지 마라 또는 매매혼이 연애결혼보다 나쁘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결혼이민자 = 매매혼 이런 등식을 머릿속에 넣고 있는 한 이들에 대한 차별은 끝나지 않는다. 앞서도 말하지 않았나. 못 배우고 나이먹을수록 다문화수용성이 떨어진다고. 개인의 선택이라면 더 말리지는 않겠는데 앞으로 살기가 참 팍팍해질 거다. 싸울 대상이 많아져서. (말세야 말세, 하는 이들을 보시라. 세상과 싸우느라 셀프격리하면 결국 힘드셔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모든 결혼은 혼인의 숫자 만큼의 사연이 있고 - 2019년에 한국에서는 23만 9천 200가지의 사연으로 혼인신고서가 작성됐다 - 우리가 굳이 신경을 써야 한다면 혼인 건수가 아니라 이혼 건수이지 않을까? - 같은 해 같은 공간에서 11만 831건의 이혼신고서가 접수됐다. 매매혼이든 중매결혼이든 그 당사자들이 연애결혼 당사자들보다 이혼율이 높다면 모를까 - 저는 이런 통계는 못 봤습니다만 - 이게 차별의 진짜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연애결혼인지 중매결혼인지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섹스할 때 여성상위를 선호하냐 후배위를 좋아하냐 뭐 이런 정도의 질문이 가능한 사이가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거부감이 드는 것은 매매혼을 한 당사자가 아니라 결혼만은 순수한 사랑으로 해야한다는 내 바람에 대한 세상의 배신이다. 그렇지 않나? 말도 통하지 않는 먼 곳에서 온 낯선 결혼이민자의 존재는 내가 한, 또는 할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어쩌나. 매매혼은 결혼이민자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주변에도 널렸는데. '결혼해 *오'를 비롯해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한 결혼정보업체를 보시라.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그들의 마케팅 카피만 봐도 이미 결혼이 무엇인지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19로 처참한 봄날이 속절없이 가는 와중에 사랑해서 결혼한 이들이 자가격리로 이혼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문득 생각한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이혼은 또 해서 무엇하나. 재혼은 다들 왜 하는 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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