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의 프랭크 할아버지

나는 지금 은퇴해서 너무 행복해.

by 전혜윰

코펜하겐에 도착하고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기분 좋은 바람이 일렁이는 날이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던 나는 점심거리를 사서 숙소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갔다.


Close on Sunday


굳게 닫힌 문 앞에 일요일은 운영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였다. 책도 읽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려고 한 내 작은 계획이 틀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요거트를 가방에 넣고 도서관 주변을 거닐었다.


'어디 가지..?'


속으로 행선지를 고민하고 있던 찰나 우연히 도서관 뒤에 있는 작은 정원을 발견했다.

세상에, 눈앞에 놓인 풍경에 넋을 잃었다.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는 금발의 친구,

엄마아빠와 함께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도시락을 싸서 점심을 먹고 있는 연인,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백발의 할머니.


짙은 나무 그늘을 피해 햇살을 쬐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치 다른 공간에 온 듯 평화롭기 그지없는 오후였다. 그 속에 한 장면처럼 녹아들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다들 이 뜨거운 햇살 아래 있는 거지?'


이상하게 나무 밑 그늘에는 마치 누가 예약이라도 한 것 마냥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햇살을 누리고 있는 그들과 달리 나는 그늘이 좋아서 나무 밑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돗자리가 없어도 괜찮은 자리를 찾으려고 했는데 웬걸, 개미가 너무 많았다.


공원 잔디밭 쭈그리고 앉아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을 하며 지나가는 개미떼를 원망하고 있던 순간, 나무 사이로 누가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 좀 보라는 듯 기웃거리는 몸짓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연둣빛 블랭킷을 깔고 의자에 앉아계신 백발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Come here!"

할아버지의 손짓에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홀린 듯 다가섰다. 그는 안경을 벗고 말했다.


"네가 서 있는 여기는 항구였어! 정말 놀랍지 않니?"

할아버지는 이 공원이 원래는 항구였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리고 한참을 이 항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여행 온 건지 여쭤보셨다. 한 달 동안 쉬러 왔다고 대답하는 코리안 걸에게 할아버지는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손짓과 몸짓, 그리고 얼굴에서 보이는 표정들에 나도 모르게 그의 돗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여기서 점심 먹어도 돼요?"라고 물었다.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신 할아버지는 자신의 점심거리로 나눠주셨다. 덴마크인들이 많이 먹는 빵과 귀여운 당근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주신 간식들과 나의 점심

그는 무척이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근데 너 아까 앉아서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아! 개미요! 개미 구경하고 있었어요.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바닥에 개미가 너무 많더라고요"


"ant girl!!!!!!!"


나를 개미소녀라 부르며 호탕하게 웃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프랭크라고 말했다. 가본 적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많았는지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에서도 빵을 먹니? 무슨 빵을 먹어? 한국이랑 여기랑 차이점이 많니? 너는 여기가 어때? 코펜하겐 좋니? 한국에서는 학생이었니?" 순식간에 10가지도 넘는 질문에 정신없이 대답을 하다가 불현듯, 마음속에 숨겨둔 질문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혹시 덴마크 사람이에요?"


"그럼, 여기서 태어나고 평생 이곳에서 살았지."


찾았다. 덴마크 사람. 덴마크인 찾는 건 거의 포기하고 있던 순간에 나타난 귀인이었다. 코펜하겐에서 자전거를 타고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은퇴하셨다고 한다.


"덴마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하던데, 맞나요?"


나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수염을 쓸며 마치 이 질문을 수십 번 받아본 사람처럼 웃음을 지었다.


"뉴스에 나오는 기사나 통계자료는 사실 어떤 질문이나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지금 통계자료로는 이 나라가 상위권에 있더구나. 하지만 이 나라 사람 모두가 그 질문에 행복하다고 확답하지는 않을 거야."


선생님의 말에 허를 찔렸다. 행복이라는 건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인데 어떤 조사를 기반으로 그런 통계가 나왔는지는 찾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덴마크 사람들이 일을 적게 해서 행복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일하는 시간이 적으니 남은 시간을 개인적으로 보낼 수 있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고 친구들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일하는 시간을 늘리면 모두가 nono라고 외칠 거라고. 그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하셨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야근은 비일비재하고 주말도 없이 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건강이 안 좋아져서 퇴사하고 여기 온 거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축하한다고 박수를 쳐 주셨다.


"Congratulation!"


갑자기 받은 축하인사에 주책맞게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한국에서 나는 왜 행복을 쉽게 말할 수 없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늘 바쁘고 정신없던 삶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소한 행복이라도 찾겠다며 행복 일기라고 불리던 노트에 행복을 쥐어짜던, 그게 진짜 행복했던 게 맞는지 의문이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럼 할아버지는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세요?"


"지금! 난 지금이 제일 행복해! 난 은퇴했거든! 매일 이렇게 보낼 수 있어!"


매주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고 예쁜 공원을 찾아 피크닉을 즐긴다는 할아버지는 은퇴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입가에 가득 번진 하얀 수염이 나풀거렸다. 한참을 수다 떨고 나서야 우리는 각자 들고 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기분 좋은 새소리, 그리고 입에는 달콤한 미니 당근. 따사로운 햇살이 이런 느낌일까. 무조건 그늘을 찾아다녔던 나는 햇살이 그렇게나 기분 좋은 온도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결에 타고 흩날리는 내 머리칼이 간지럼 피는 소리를 들었다.

한창 신문을 읽던 그는 나의 한국어 책이 신기하다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책 한 장을 찢어 선물로 드렸다. 신기한 듯 계속 쳐다보다가 꽃을 구경을 시켜준다는 프랭크를 따라 일어섰다.

아내에게 보여준다며 열심히 사진을 찍던 그는 해가 넘어갈 즈음에야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옆에서 짐을 싸는 나에게 엽서 하나를 건넸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썼다고 한다. 우리 옆에 있던 나무와 아주 많이 닮은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행복을 찾고 싶어 떠났고,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 말에 자신을 만난 이야기도 넣어서 꼭 책을 써달라고 악수를 건넸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집에 놀러 오라고 주소까지 찍어준 프랭크는 나와의 이야기가 참 좋았고 오랜만에 아주 많이 즐거웠다고 말하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의 미소에 덩달아 내 입가에도 웃음이 퍼졌다.


나지막이 '아, 행복하다.'라고 내뱉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가 한 명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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