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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검은 29화

허름한 시간에서 제법 멀리 왔다

by 혜윰


오후의 나른한 빛이 번지는 옥탑 마루에 걸터앉았다. 햇볕이 눅눅한 마음을 따사한 손길로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녀는 무심히 책장을 넘겼다.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시간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한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 (박준, <여름의 일> 중에서)

눈으로 만지작거리던 시 구절이 그 시절의 그녀를 닮아 있었다. 무뎌졌다고 믿었던 감정이 얇은 막 아래에서 여리게 흔들렸다. 시간의 더께 아래 잠잠하던 마음은 자신을 닮은 문장을 만나면 미세한 통증처럼 되살아났다. 아직 완전히 벗어난 적 없다는 듯이.


지희는 시를 좋아한다. 마음이 허기진 날이면 밥보다 시를 먼저 찾는 아이. 그 친구 덕에 그녀도 시와 서툰 낯을 텄다. 오늘도 지희네 옥탑 조붓한 마루에 앉아 친구가 건넨 시집 속 적요한 시의 무렵에서 기웃거렸다.


한때는 잊어야 할 것들과 지워야 할 것들이 틈만 나면 밀려와 마음을 쓸어가곤 했다. 그 허름한 시간에서 제법 멀리 왔다. 이제는 더해야 할 말도 더는 덜어낼 기억도 없다. 소란함이 지나간 자리를 조금 더 덤덤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치기 쉬운 마음을 품고 있다. 마음 상자 겉면에 ‘프레자일’과 ‘취급 주의’를 더덕더덕 붙여놓고도 안심할 수 없어 온통 날을 세우고 있다. 마치 가시를 단단히 세운 선인장처럼.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 가시가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득 옥상 한편의 화분들에 눈길이 머물렀다.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듯 윤이 돌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모두가 흔들리는 가운데 오직 선인장만이 고요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안간힘인지 단단함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시들 사이로 아주 작은 꽃망울 하나가 돋아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놓쳤을 만큼 여린 기척이었다. 아픔과의 사투 끝에 마치 마음이 틔운 그윽한 생명 같았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쓰다듬듯 구름이 나릿나릿 흘러갔다. 구름처럼 그녀도 허름한 시간에서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었다. 오래 눌린 가슴 자락이 간질간질했다. 마치 상처가 아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려는 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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