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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검은 28화

밤과 낮

by 혜윰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꺼진 모니터 속, 검은 형체 하나가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그림자가.


검은 마우스 패드 위에 놓인 마우스를 움직이자 화면이 밝아졌다. 열어놓은 문서는 창백했고, 그 속에서 검은 커서만이 작은 숨을 쉬듯 깜빡거렸다. 흰 여백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여백을 서성이던 눈동자가 멈추고 생각은 기억의 도로를 헤매었다. 기대로 부풀었던 허연 얼굴은 그녀의 무반응에 낯빛이 흐려지더니 결국 어둠에 묻혔다. 검은 화면 속 형체가 다시 또렷하게 살아났다.


시선을 내리니 검은 키보드 위 하얀 글자들이 고요한 질서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조용한 대비가 흐트러진 시간을 불러 모았다. 전하지 못해 얼어버린 마음의 냉기가 낙엽처럼 바스러지던 날들. 그 사이로 소리 없이 끈덕지게 스며든 생의 온기. 어떤 계절들은 그렇게 두 온도가 격렬히 부딪히며 흘러갔다. 질척이기도 하고 허둥대기도 하면서, 그러나 악착같이.


생각해 보면 삶은 언제나 한 가지 색으로만 이어진 적이 없었다. 검은 곳에도 흰 결이 스며들고, 흰 여백에도 작은 그늘이 따라다녔다. 툭 건드리면 밝아지는 화면처럼 밤의 끝에는 낮이 있었다. 기쁨이 슬픔의 손을 잡고 지나가고, 슬픔이 기쁨의 발끝을 적시며 멈춰 서는 날도 있었다. 온전히 검은 것도 온전히 흰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니터 속 검은 형체의 윤곽이 말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밤이 길었던 계절을 지나 어느새 낮이 조금씩 더 오래 머무는 삶의 절기를 맞이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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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