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공유하는 삶의 공간
요즘 이야기 하는 co-living space는 다수의 사람들이 인프라나 공간을 서로 공유하며 살도록 만들어진 집을 이야기하지만, co와 living을 한 단어씩 해석해보면 영어로 보아도 한자로 보아도 ‘공동으로 살아있다, 함께 살아간다’ 와 같은 의미이다. ‘공동체적 삶’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와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3~4세대의 대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거나 마을이 공동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던 세상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유아기를 보낸 신월동이라는 동네의 골목에는 가구들이 말 그대로 서로 이웃사촌처럼 일상을 공유하고 밀접하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골목은 들어서면 첫 집부터 골목 끝 집까지 한 예닐곱 가구 정도 되었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 집 할머니를 부를 때면 끝에 집 할머니, 두번째 집은 두째 집 할머니 이런 방식으로 불렀다.반상회라는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할머니들이 (그때는 할머니들이 그런 집안일 대소사의 결정권자였던 것 같다.) 모임을 가지셨고, 우리집에서 반상회가 있는 날은 안방에 할머니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서 가운데 귤과 같은 제철 음식을 놓고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하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 할 수 있다.
아이들도 서로의 집들에 자주 마실 갔었고, 차도 드나들지 않던 골목이었으니 그런 골목이 그냥 놀이터였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앞집 아이와 나는,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쭉 단짝이었다. 그 아이와 서 너 살 때 종종 집을 나가서 놀다가 길을 잃고는 했는데, 그러면 그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옆집 할아버지가 나와 단짝이 임야에 길게 자란 잡초 속에서 노는걸 발견하고 자전거로 둘을 태우고 집으로 간 기억이 난다. 물론 이렇게 저렇게 들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기억을 재구성 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억들이나 이야기들은 이웃 사이가 꽤나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 속에서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단순히 시설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모습보다 ‘co-living’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표현 하는 것 같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에서 살며, 보통 옆집 윗집 아랫집과 친밀한 관계로 지내지는 않는다. 층간 소음이 크나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서로 불편해하거나 간혹 엘레베이터에서라도 만나면 어색하기도 하다. 왜 내가 기억하는 30년 전의 모습과는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을까? 급격하게 줄어드는 인구, 빠르게 늘어나는1인 가구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공동체적인 생활상이 다시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밀레니얼 이후의 세대는 부동산을 ‘매매’하기보다는 마치 음악을 스트리밍하거나 잡지를 구독하는 것처럼 공간을 ‘스트리밍’하고, ‘구독’한다. 평생의 월급을 모아, 빚을 내서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인생 어느 시점에 치러내야 할 목표로 삼을 수 없는 현실이다. 작금의 부동산 가격은 한 사람이 평생의 월급을 모아서 살수 있는 가격도 아니다. 차라리 좋은 공간, 살아보고 싶은 공간을 찾아서 기간 단위로 살며 시설과 인프라를 쉐어링한다. 혼자 살더라도, 집단적 커뮤니티에 대한 소속감과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동체적 커뮤니티도 다양하다. 공통의 관심사를 갖은 사람들을 위한 목표 지향적 커뮤니티가 생겼으며, 공간플랫폼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성장한다. 내가 예전에 기억하던 동네 반상회는 운명적인 로케이션기반의 커뮤니티였다면 이제는 로케이션과 특정 분야의 관심사에 대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선택적 커뮤니티인것 같다.
1인 가구가 사는 원룸이나 오피스텔과 같은 형태의 집에서 벗어난 조금 더 문화적면서도 커뮤니티 요소가 접목된 통의동 집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주거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일본의 셰어하우스에 대한 설계를 보고 셰어하우스라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고야의 LT Josai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개인 프라이버시를 보존하면서도 공간 구조상 우연히 거주자들과 마주치게 되는 공간, 모여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등, 트랜지션 공간과 스테이하는 공간에 프레임은 있지만 솔리드한 벽은 없는 애매함을 유도한 공간이 특징적이었다.
일본에는 현실적인 니즈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코리빙 스페이스가 운영되고 있었다. 대지진으로 피해를 본 리쿠젠타카타시의 리쿠카페는 주민들을 위해 오픈카페 및 커뮤니티 스페이스가 운영되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처럼 맞아주지만 비혈연가족을 지향하는 ‘시프트Cift’, 안테룸 아파트먼트와 같은 곳들의 발전은 다양한 주거 형태를 향유하고 실험할 수 있게 한다.
응답하라 1999의 하숙집은 2020년의 셰어하우스 우주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국내에서 다양한 형태의 세어하우스나 코리빙이 생겼거나 생기고 있지만, 대기업이 업계에 뛰어들며 실험적이거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화와 시도를 해볼 수 있는 플렉서빌리티보다는 더 이윤을 최고 목표로 하는 커머셜한 형태의 공간을 지향하게 된 것이 아쉽기는 하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니즈에 따라 공간이 다변화되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소형 아파트나 오피스텔과 다를 바 없지 않을 까 생각 되었다. 코리빙, 세어드 하우스와 같이 목적성이 드러나는 명명을 하는 곳, 이런 공간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공간의 존재의 이유를 계속 상기시키고 초심을 지켜야 한다. 커뮤니티를 지향한다면 다양하고 실험적인 커뮤니티가 운영 될 수 있도록, 프리미엄 주거를 지향한다면 프리미엄 한 서비스가 지속 될 수 있도록, CSR차원에서 제공을 한다면 운영시 CSR과 연계된 요소들이 디테일한 부분까지 와 닿아야 한다. 초심을 잃은 공간은 사용자들이 가장 먼저 느낀다. 입주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솔직해져야 한다. 목적과 취지에 맞고, 주변의 컨텍스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계속 진화 된다. 세속적인 아파트나 주상복합 그리고 나이브한 주택 또는 빌라의 사이에서 코리빙 스페이스는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주거형태의 하나로 자리 잡지 않을까? 그 곳에서는 공동체적 따스함과 진정성이 느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