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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Oct 05. 2023

불안 소화제 | 사워도우 샌드위치

해방촌 루베이크


쌉쌀한

사워도우를 씹으며


우리에게는 ‘성찰 지능’이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자기 이해 지능’, ‘자기 객관화 지능’인데 자신의 상황, 감정, 행동 등을 점검해 보면서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성찰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순간은 대가 없이 오지 않는다. 일상이 평온할 때는 성찰이 쉽지 않다. 오히려 밤잠 못 이루는 날들과,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구간을 지날 때 비로소 찾아온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잘 넘 길 수 있도록 해주는 소화제가 된다.


최근 새로운 업무와 역할로, 밤잠을 설치는 여러 날을 보냈다. 업무도, 관계도 모든 게 버겁기만 했다. 또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가득 차 오르면서 자존감은 끝없이 무너져 내려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가면 육아는 그저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과제 같았다.


성찰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럼 이 시기를 잘 보낼 방법은 딱 하나.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 나만의 소화제를 제조하는 것이다.




루베이크

Roux Bake


긴팔 긴바지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가을날 오늘도 점심시간 짬을 내서 베이커리로 향했다.


몇 달 전 해방촌 근처를 검색해 보다가 맵에 저장해 둔 '루베이크'. 실제로 찾아가 보니 2D 지도상으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악명 높은 해방촌 언덕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전은 메뉴가 사워도우뿐이라는 것.



사워도우 첫 입에 바로 이태원 '오월의 종'이 떠올랐다. 장인 포스의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본인만의 철학으로 오랜 시간 연구하며 만들었을 것 같은 맛. 그러면 자연스레 사장님도 가게 분위기도 무겁고 진지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젊고 발랄한 사장님이 운영하는 귀엽고 트렌디한 가게였다. 게다가 군데군데 '버섯'을 테마로 한 서적이나 소품이 위트 있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묵직한 빵 맛과는 사뭇 다른 낯선 조합이 방문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매력에 오늘도 수많은 빵친자(빵에 미친 자)들이 해방촌 언덕을 오르는 것 아닐까?



요번 시즌 루베이크의 점심 메뉴는 딱 한 가지 사워도우로 만든 잠봉 뵈르다. 속재료는 어딜 가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잠봉 뵈르지만, 시큼하고 쫀득한 사워도우를 베이스로 하니 어딘가 특별한 비주얼과 맛을 냈다.


다른 빵들과 달리 천연 발효종을 사용하는 사워도우는, 스타터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완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사워도우는 촉촉하고 쫀득하며 씹을수록 그 특유의 신맛은 담백하고 고소해진다.


내가 계속 일을 하고 싶은 이유도, 이렇게 오랜 시간 나 스스로를 천천히 깊게 완성시켜 가고 싶기 때문이다. 남들의 크고 작은 성공이나 참견에 휘둘리지 않고, 마치 사워도우가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하나하나 제대로 해가고 싶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니 조금은 속이 가벼워진 채 회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도 좋은 점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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