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막막한 이 날들을 부디 잘 견뎌내길
여지없이 찬물이다.
봉사자 숙소에 찬물만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샤워기를 틀기 전에 그 차가움이 떠올라 매번 움츠리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한 톨 미지근하지 않고 온전한 찬물로 샤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른다.
입에서 괴음이 절로 나온다.
덕분에 깨어있다는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봉사를 마치고 나면 4시, 아직 해는 쨍쨍하고 밤보다는 낮에 가깝다.
봉사가 꼭 고단하고 힘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봉사를 마치고도 여력이 많이 남아 아쉬운 건 맞다.
점심시간에 두 시간가량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굉장히 활력 있는 상태로 봉사지를 나선다.
일과 중 숙소에는 대부분의 봉사자가 없고, 야푸는 자고, 스태프들은 사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쉴 때를 제외하곤 보통 카페 투어를 간다.
어딘가에 특정 기간을 머물러야 할 때면 좋은 카페를 먼저 찾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다.
카페에 퍼져있는 커피 향속에 묻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커피라는 기호 식품에 어느 정도 중독돼있다.
갓 추출된 커피의 향을 깊숙이 맡을 때와 첫 한 모금이 가장 좋고, 이후 세 모금을 할 때까지 몸과 마음의 이완됨을 가만히 느끼고 있을 때 몹시 행복하다.
그렇게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카페의 전경을 살펴보는데 카페가 주는 묘한 안정감과 활기가 좋다.
필리핀에서는 SM몰의 보스 커피나 아얄라 몰의 커피빈에 종종 앉아있곤 했다.
프랜차이즈보다는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카페를 더 좋아하지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었고 아무래도 해외에 나와있으니 넓은 반경으로 움직이며 많은 사람들을 보기엔 이런 곳들이 좋았다.
베트남에서도 그런 패턴은 마찬가지다.
숙소가 있는 마을에는 밍숭 한 쓰어다를 파는 카페와 야푸가 좋아하는 찻집(을 가장한 맥주집) 뿐이어서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이동했다.
베트남은 필리핀보다 사정이 낫다.
커피 생산국인 데다가 고유의 추출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국 원두가 가진 특성 탓에 드립으로 추출한 것은 썩 입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태우듯 볶아버린 원두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맛이 으레 한국 프랜차이즈 점에서 마시던 맛에 가까워서 묘한 익숙함이 심적으로 안정됐다.
나는 구수함보다 고소함이 좋고 산미가 감도는 것이 좋다.
보통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유독 단것이 당길 때가 있다.
그런 날엔 쓰어다를 주문하거나 콩카페의 코코넛 커피를 마셨다.
한 번은 호안끼엠 호수 앞에 있는 콩카페 이층에서 코코넛 커피를 마시며 베트남에 대한 글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수민이가 카페로 들어왔다.
반미를 포장한 봉지를 들고서 계단으로 올라오는 수민이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서울에 있어야 할 얘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동갑내기 수민이는 직장 근무 중에 만난 인연이다.
후배와 함께 영국을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트남을 경유했다고 한다.
내가 하노이에 있는지 몰랐다고 하고 나도 수민이가 베트남을 경유하는지 몰랐으니 이 만남이 신기할 따름이다.
코코넛 스무디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간의 대화를 나누다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하고 헤어졌다.
아침에 도착해서 저녁 비행기로 떠나는 수민이와 동행은 그날 다섯 끼를 먹고 떠났다.
대단한 열정과 일정이다.
드립 커피나 에스프레소를 물로 희석한 아메리카노를 즐겨마시는 나에게도 콩카페의 코코넛 스무디 커피는 꽤나 매력적이다.
적당히 단 맛에 코코넛의 고소함이 더해져서 스무디를 먼저 먹어도 맛있고 밑에 깔린 커피와 섞은 후 마셔도 좋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지만 베트남에서 마시는 것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에 우연한 추억이 입혀져서 인생에 남는 기억이 됐다.
쓰어다 라고 발음되는 베트남의 연유 커피는 진한 믹스커피를 연상시키는데 그보다 더 진하고 달달하다.
연유가 들어간 탓인지 그 농밀한 단맛이 버거워서 늘 쓰어다를 시킨 후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가져가서 물을 그만큼 더 부어달라고 한다.
그럼 내 입맛에 맞다.
하이랜드의 쓰어다를 즐겨 마셨다.
호안끼엠의 콩카페와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하이랜드 카페 직원들과 친분이 생겨서 나중에는 그 친분이 즐거워 갈 때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저녁이 부실하면 쌀국수나 반미를 곧장 사 먹으러 나갔다.
1일 1 쌀국수 1 반미다.
포장마차의 떡볶이가 맛있는 것처럼 반미도 길가에서 사 먹는 게 맛있다.
한국에 반미 집이 많이 생겼지만 아직 그 맛을 내지 못했다.
내 기억의 반미 빵은 있는 듯 없는 듯 가볍고 부드러워야 하고 소스로 눅눅해선 안된다.
오이, 당근, 고수, 돼지고기 또는 햄 정도만 들어간 게 좋고, 핫소스를 한입 베어 먹을 때마다 뿌려먹어야 제맛이다.
양파나 짜봉(실모양의 말린 해산물)을 넣어주는 곳도 괜찮다.
기호에 따라서 계란이나 치즈 등을 추가할 수 있겠지만 매일 다르게 시도해본 결과 가장 가볍게 기본으로 만든 것이 가장 좋았다.
유명하다는 가게는 가보지 않았지만 길거리 반미 중에는 맛없는 곳이 드물었다.
식사마저도 마친 저녁엔 봉사자들이나 스태프들과 시간을 보냈다.
개중에 봉사자가 아닌 스텝이 되기 위해 타국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는데 첸과 징의 경우가 그렇다.
첸은 영상 쪽으로 커리어를 쌓기 위해 캄보디아에서 왔고, 징은 HR 업무를 배우기 위해 미얀마에서 왔다. 소위 인턴이다.
베트남 스탭을 제외하면 유일한 아시아 인이어서 였을까 그들은 유독 나와 각별했다.
함께 마을을 산책하고, 베트남 스탭이 소속된 축구팀에서 축구를 하기도 했고,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미래를 위한 배움도 중요하지만 생계를 위한 벌이가 당장은 급한 사정이어서 늘 고민하고 걱정하고 시름했다.
동네 슈퍼에서 맥주를 사서 숙소 앞이나 도로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서 마실 때면 그런 심란함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풍족하지 못한 형편을 한탄하면서도 그것에 침몰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승화시키고, 하루의 고단함을 맥주 한잔에 털어 보내려 하는 모습이 나는 좋았다.
이들이 부유하다 말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것은 흔한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나 삶의 모습이 닮았다.
첸과 징이 청춘을 잔뜩 억눌러온 게 새어 나오는 날이면 우리는 호안끼엠 쪽의 클럽에 가서 춤을 췄는데 둘은 그럴 때마다 온몸으로 감정을 발산했다.
우리가 찾는 베트남 클럽에는 유럽 여행자들이 늘상 점령하고 있어서 우리가 안에서 무슨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든 누구도 개이치 않았다.
그때 첸과 징의 얼굴은 가장 청춘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멘티들도 이런 고민과 걱정을 했다.
첸과 징, 멘티들, 각국에서 온 봉사자들 모두가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산다.
나도 그렇다. 여행 중에 나는 변했을까, 변해가고 있을까 궁금하다.
'이전보다 성장하며 원하는 답을 찾아가고 있는 걸까.'
방학 때는 친구들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한두 달 만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태어나 처음 학교에 가는 것 같이 설레었고, 아이들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나는 늘 그대로인 것 같은데 친구들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새 학기를 시작했다.
반가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서먹함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원래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 방학 동안 성장했다.
학기 중에는 도무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것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방학이 끝나고 다시 만나는 날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 보내는 각자의 방학이 끝나면 우리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게 막막한 이 날들을 부디 잘 견뎌내길.
아주 오래전에 베트남을 다녀온 분들이 G7 커피를 사 오면 맛보곤 했다.
어린날 나에게 그 빨간 봉지는 베트남을 연상케 했고, 이전에 맛보지 못한 연유의 달달함은 가보지 못한 곳을 상상케 했다.
한 상자를 사 와서 한두 봉지씩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생색을 낼 때도 나는 그 봉지에 써진 베트남어와 낯선 맛을 좋아라 했다.
관광객들이 기념품으로 구입하는 것에는 그 나라의 이미지와 기대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는데 베트남은 그것이 커피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뒤로 하고 복학하기 위해 다시 찾은 서울은 카페 붐으로 휩싸여 있었다.
이전에도 커피를 마시고 카페를 다녀온 적이 있지만 세상이 바뀐 것처럼 느껴지는 변화였다.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고 카페에서 만나자는 말이 별스럽지 않은 것이 될 때 나도 그런 대열에 합류하고자 카페를 찾았다.
당시 학교 정문 쪽에 이디야를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마신 기억이 난다.
첫 두 모금을 마시고 나는 하염없이 그 커피잔을 바라봤다.
나머지 커피를 마시는 것이 몹시 막막한 느낌이었다.
토마토 주스를 갈아주실 정도로 이디야 점장님과 친해질 때쯤 나는 상황에 따라 커피를 골라 마시게 됐고 이디야 벽에는 내 전용 출석표가 붙어 있었다.
그 해에 아이스 캐러멜 마끼아또를 참 많이 마셨다.
아무래도 아메리카노는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커피를 공부하고 선호하는 맛을 찾을 수 있게 됐지만 왠지 가끔 그 막막함을 느낄 때의 커피 맛이 그립다.
그 순간들이 그립다.
Tess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이틀을 출퇴근 한 뒤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오토바이가 있어야 한다.
1층 사무실에서 스태프들 옆에 앉아 오토바이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두 개의 버스를 타고, 걸어서 봉사지에 도착하면 한 시간이 걸리곤 했는데 오토바이를 타면 겨우 15분이라니.
스태프들 옆에서 이런 사실을 내게 감춘 것은 기만이라고 성토했다.
봉사자들의 안전을 위해 봉사자 입소 첫날 오토바이를 이용하지 않도록 안내하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오토바이에는 일체 관심 갖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야푸와 바티스도 오토바이를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런 내가 측은했는지 스태프들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봉사자 숙소 한편에 사용하지 않는 오토바이가 있는데 수리해서 사용하겠냐는 것이다.
기꺼이 그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외쳤고, 오토바이를 인계받아서 곧장 쌀국수집 옆에 있는 수리점에 맡겼다.
헬멧은 스태프 중 한 명이 안 쓰는 것이 있다며 선물해줬다.
그 흰색 헬멧에 모두 달려들어 그림을 그리거나 문구를 새겼다.
미적인 요소는 포기한 헬멧이지만 나만의 것이 생겨 마냥 즐거웠다.
오토바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도 자전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달랐고, 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달랐다.
운전을 하다 보면 움직임의 반경이 커지고, 대중교통이 가지 않는 길로 바퀴가 굴러 자유롭다.
어딘가 가보려 하는 마음의 시작점부터 다르다.
마을 마실이나 나가 볼까 하던 일상에서 호안끼엠 호수나 한 바퀴 돌고 올까라는 생각이 쉬운 일상이 된다.
알다시피 베트남 도로에는 굉장히 많은 오토바이가 움직인다.
멘티들 말로는 중학생 때부터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동차는 가구당 한대, 많아야 두대이지만, 베트남에서는 사람당 오토바이 한 대인 셈이다.
2019년 기준으로 하노이 인구가 750만 명, 오토바이 등록수가 570만 대이니 말 다했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타야 베트남의 진면목 중 일부를 느낄 수 있다.
보기에 위험해 보이던 오토바이 대열도 그 틈에 있으니 무척 안전하다.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특히 운전자들의 눈을 마주 본다.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오토바이의 가장 큰 매력이고, 베트남에 한발 더 다가서는 방법이다.
더운데도 살이 타지 않기 위해 옷을 머리까지 둘러쓴 여성 라이더들, 서로 위치와 방향을 알리기 위해 쉴 틈 없이 울리는 경적소리, 그 많은 오토바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주차 관리자, 도로를 건너는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면 위험하다는 것도 직접 오토바이를 운전하면서 알게 됐다.
봉사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베트남 도로를 건널 때는 오토바이가 오는 방향을 보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말고 가던 속도 그대로 앞으로 걸으면 된다고 했다.
발걸음이 멈추거나 뒷걸음질 치면 사고가 난다.
라이더들은 보행자의 걸음을 예측하며 지나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도로를 건너던 보행자가 나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면, 내가 지나갈 때까지 멈춰 계실 앞으로 발을 딛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난감해하며 자전거를 멈추곤 했다.
이런 것들을 전해 듣고 스스로 공부해도 알 수 있겠지만, 경험으로 체득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에게도 오토바이를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오토바이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과 많은 것이 비슷해서 하노이 모든 지면을 온몸으로 비비고 다닌다.
Grab을 이용하면서 본 경로와 야푸, 바티스, Tess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가며 익힌 경로로만 다니다가, 점차 다른 길도 알게 됐다.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호안끼엠을 포함해서 주변의 번화가들을 편하게 오갈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오토바이 운전에 자신감이 붙고 긴장이 없었다.
그리고 아스팔트에 넘어졌다.
나는 아스팔트에 누워있다.
오토바이가 넘어지고 나서 ‘나는 왜 아스팔트에 누워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언젠가 읽은 ‘일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라는 책의 문구처럼.
몇 초 뒤 '내가 오토바이를 탄 채 넘어졌구나'라고 상황이 인지되자 아직은 누워있는 몸에 대한 걱정이 찾아와 덜컥 겁이 났다.
오토바이에 깔린 다리와 팔이 있긴 한 것인지, 처참하게 피 흘리고 있는 건 아닌지, 어디가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닌지. 그런 두려움 속에 아주 조심히 발가락을 움직였다. ‘있구나.’ 그것이 기쁘다.
손도 움직여보며 천천히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주변에 라이더들이 모여들어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우고 나에 안부를 묻는다.
그 걱정 어린 시선과 말들이 따뜻했다. 물론 부끄럽고.
경황없이 연신 '고맙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조심히 일어났다.
‘아 일어설 수 있구나’ 그럼 정말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전기가 오는 듯 쨍한 다리를 움직여 오토바이 손잡이를 잡고 도로 옆으로 옮긴 후 그 옆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마주 오던 차가 내 앞쪽으로 급회전하는 것에 놀라 브레이크를 잡았고 비에 젖은 도로에 미끄러지며 혼자 넘어졌다.
다행히 차나 오토바이와 충돌은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기억에 없을 정도로 놀랐다.
헬멧을 썼기에 머리를 다치지 않았고 워낙 순식간에 넘어져서 신체로 지탱할 틈도 없었다.
원래 넘어질 때 버티면 다치는 법이다.
손목이 땅과 마찰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계가 손목 대신 갈렸다.
가만히 앉아서 그 도로를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한 후 일어서서 본격적으로 몸을 점검했다.
정신 차렸을 때 왼쪽 다리가 오토바이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깡충깡충 뛰어도 보고 구부려 보며 다리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다 괜찮은데 왼쪽 발을 구부려 디딜 때 통증이 있었다.
부러진 건 아니지만 뼈에 금이 갔어도 정말 큰일이다.
앞으로 세계여행 여정이 까마득하고 짊어져야 할 짐은 무겁다.
사고 직후엔 일어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아픈 다리가 큰일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참 마음이 약하고 간사하다.
다 괜찮을 것이다.
긁혀서 피 흘리는 손으로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몹시 처량했다.
더러워진 옷을 벗고 곧장 샤워장으로 향했는데, 샤워기를 틀기 전에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올 것이 떠올라 잔뜩 움츠렸다.
이런 날은 뜨거운 물로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야 하는데 여지없이 찬물이다.
그래도 샤워를 하니 한결 기분이 나았다.
늘 그렇듯 평화로운 1층,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 일기를 쓰고 책을 보고 잡담을 나누는 봉사자들 틈에 나도 한자리하고 앉아 있다가 컵라면과 반미를 사 왔다.
가뜩이나 봉사자들의 안전을 위해 오토바이 사용을 제재하고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넘어진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
이후로도 오토바이를 잘 탔고, 베트남에 가면 오토바이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봉사를 위해 베트남 어를 익히고, 제공되는 식사뿐만 아니라 동네의 길거리 음식을 탐닉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등 베트남 문화에 다가갈수록 베트남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았고 봉사 기관 내의 스태프들과도 가까워졌다.
여타 봉사자들보다 그들 문화를 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오토바이가 서로 있으니까 봉사기관 외의 장소에서 만나기도 하고, 멘티들도 먼 곳에서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한 번은 내 담당 스태프인 키엠 집에 초대받아서 가는 길에 오토바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일이 있었다.
키엠은 오토바이 뒤에서 초록색 끈 하나를 꺼내서 내 오토바이 앞에 묶었다.
이후로는 키엠 오토바이에 매달려서 기차처럼 도로를 달렸다.
주변에 서너 명의 스태프들과 함께 가는 길이었는데 다들 나를 놀리느라 많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