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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계획의 실패

 로마 테르미니에 도착하자마자 트레비 분수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숙소까지 이동하는 것을 로마 1일 차 도보 경로로 잡았는데 숙소가 바티칸 시티 좌측에 있다 보니 테르미니에서 시내 중심부를 관통해야 했다.

 내리쬐는 태양에 덥고 짐은 무거웠지만 로마에 왔다는 고양감과 로마를 둘러보는 즐거움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경찰 제복, 피아트 차, 울퉁불퉁한 도로, 유적으로 보이는 건축물들 모두가 눈에 알알이 박혔다.

 로마에 와서도 아말피 해안에서 느끼던 정취의 결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물론 바다와 도시의 환경이 다른 탓에 바닷가의 정취는 없지만 로마에도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이 없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준다.

 이 도시에 현대식 건물의 차가움이 없었으면 했다.

 인터넷과 화장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식사 가격도 저렴한 맥도널드에서 허기를 달랬다.


 트레비 분수에 도착해서 수많은 인파에 놀라다가 멀지 않은 곳에 스페인 광장이 있다는 것을 지도에서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스페인 광장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나온 장면의 배경이 되며 유명해진 장소다.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조차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여행의 마법이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

 광장의 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도시의 여행은 이렇게 발 닿는 대로 걸어가서 숙소에 도착하면 마무리될 모양이다.

 숙소까지 5km가량 더 가야 하는데 25km를 걸은 경험이 한계치를 높여준 탓인지 아직 체력이 넉넉했다. 

 다만 왠지 조금 답답했다.


 중심가를 벗어난 뒤 테베레 강을 건너자 운행을 멈춘 회전목마가 있었다.

 그 앞쪽에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사진과 포스터를 판매하는 노점이 있었고, 조금 더 걸어가니 산탄젤로 성이 보였다.

 산탄젤로 성의 먼 뒤편으로 바티칸의 푸른 돔이 있으니 이 무슨 영화 같은 풍경인가 싶어 어지러웠다.

 형형색색으로 멋진 옷을 입은 관광객들이 없다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난대 없이 과거로 이동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명소와 낭만이 도시 안에 즐비한 것에 어안이 벙벙해서 사방을 둘러보며 산탄젤로 성 앞에 서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그 선명한 선율에 고개를 두리번거려보니 산탄젤로 다리 위에 자리 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곧이어 반주 음악이 담긴 CD를 준비하고, 목소리를 대신하여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다.

 그곳에 다가가 짐을 바닥에 내려두고 그늘 쪽에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산들한 바람이 불어오고, 다리 밑으로 강이 흐르고, 강 옆으로 늘어선 가로수 나무들은 싱그러웠다. 

 멀리 보이는 언덕 경사면에는 아말피처럼 알록달록한 집들이 붙어있었고, 서쪽으로 지는 해가 그 언덕 위로 내려앉으며 따스했다. 

 연주자는 산탄젤로 다리 양쪽으로 늘어선 천사들의 조각상 사이에 서있었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온몸에 행복감이 휘감아 돌아서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싶었다.

 도시에 온 뒤로 좁았던 시야가 그제야 트이고 마음이 편했다.

 연주를 마친 청년을 위해 동전을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었는데 음악이 준 행복에 비해 적은 것 같았다.


 산탄젤로 다리에서 보이는 바티칸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으로 우회하여 걸었다.

 음악이 준 행복은 얼마 못가 가방 무게에 으스러졌다.

 바티칸을 왼쪽으로 지나쳐서 긴 경사 구간을 통과한 뒤에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기진맥진했다.

 언덕 위에 있을 줄이야. 그날 로마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가장 가파른 경사를 올라갈 때는 된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숙소는 혼성 도미토리였고 3개의 침대 중 2개는 먼저 온 여행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사전에 해당 정보가 없었지만 샤워하고 자는 것만 해결되면 문제없었다. 

 각기 개인 침대인 데다가 서로 간격도 멀고 내부가 깔끔해서 좋았다.

 여행 중 유독 저렴한 곳은 침대 수가 많거나 혼성 도미토리였다. 

 처음에는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행자들로 인해 당혹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피할 곳도 없으니 언젠가부터 나도 옷을 갈아입는 것에 태평해졌다.

 단기간 여행이거나 소중한 사람과 떠난 여행에서는 안락한 실내, 전망 좋은 숙소 위치, 근사한 조식과 어메니티 등도 고려 대상이겠지만 나와 같은 여행자가 숙소로 가서 하는 일은 자는 것과 씻는 것이 전부여서 그 외에 많은 것이 무용하다.

 물론 여행자를 만나고 정보를 교류하는 즐거움도 여행자 숙소의 일부지만 이것은 그날 만나는 여행자에 좌우되는 것이어서 숙소와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에서 온 여행자는 늦게 들어와서 인사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행자는 성격이 시원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식비 소모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사 온 컵라면 두 개를 꺼내서 그녀가 준비한 조각 피자와 나눠 먹었는데 뱃속에서 더 자극적인 한국 라면과 쌀밥, 김치를 달라고 아우성쳤다.


 침대에 누워서 로마에서의 첫걸음을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거의 통과만 한셈인데도 이렇게 도시를 돌아다닌 다는 것은 힘들다.

 로마 자체에 대한 감상은 좋지만 도보여행을 결심한 취지에 비춰 하루를 돌아보면 만족스럽지 않았다.
 왠지 가봐야 할 것 같은 장소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보니 동선이 돌아가게 되고 잦은 머무름이 발생했다.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가야 하는 것도 힘들다.
 눈과 머리가 바쁘니 생각하는 것도 줄어들고, 도보여행의 목표나 이유도 잊게 된다.
 마음 한편에 로마에서 도보 여행한다는 것이 잘못된 판단은 아닌지 불안감이 생겼다.

 아말피 해안을 걷던 것과 같은 만족감이 왜 이곳에 없는지, 어떻게 해야 로마에서도 만족스러운 도보 여행을 할 수 있는지 고민 중이다.


 새벽과도 같은 이른 아침, 부산함에 눈을 떠보니 한 명은 판테온으로 간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시내를 돌아본다고 했다.

 다른 여행자들도 제각각 로마를 두 발로 걷는다.

 나는 오늘 숙소에서 짐을 짊어지고 여행을 시작해서 다음 숙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하루 여행을 마치고 다른 여행자들은 다시 이 숙소로 돌아온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한번 떠진 눈은 쉽사리 감기지 않았고 그대로 일어나서 로마의 아침을 맞이했다.

 정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서기 전까지 하루의 경로를 고민했다.

 본디 숙소를 로마 동쪽으로 예약하고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을 경유해서 그 숙소에 도착하는 것을 계획했으나 현재 머무는 곳에서 가까운 바티칸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전날 시스티나 성당을 예찬하던 여행자의 말에 팔랑인 귀는 아침에 재차 권유하는 말에 한번 더 흔들렸고 급기야 집을 나선 후에 경로를 꺾어 바티칸 박물관 입장을 위한 줄을 서기에 이르렀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휩쓸려 박물관과 성당을 탐험하다 보니 도보여행보다 더 많은 피로가 다리에 쌓이는 느낌이었다. 

 바티칸의 모든 것을 볼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독일을 떠나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이제 안 간다고 다짐했는데도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황홀했다.

 그 모든 내부 여행을 마치고 대 성당 앞 오벨리스크로 나왔을 땐 기진맥진하고 더위에 어지러웠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그리워서 가까운 젤라토 가게를 찾았다.


 바티칸에 입장하기 전에 줄을 설 때 앞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을 돌려서 자리를 맡아줄 수 있냐고 묻길래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손에 들고 나타나서 고맙다며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챠오” 고맙다고 답하며 웃어 보였다.

 고소함과 조금의 버터리함이 섞여 매력적인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먹는 동안에  도보 경로나 일정에 대한 고민을 잊었고 다 먹은 뒤엔 마음이 즐거움과 기대로 가득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마법처럼 전환이 필요한 순간엔 이 아이스크림을 찾기로 했다.


 계획대로 앞으로 가지 못한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걷는 동안 여행자를 붙잡는 잡상인들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기에도 내 행색이 몹시 고단해 보였을 것이다.

 앞뒤로 이 엄청난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것은 끝없이 의지와 싸움이었고 실제로 나는 힘들었다.

 거리의 수많은 상인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런 심경을 담아 전했다.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을 때는 꽤 지쳐있었고 그 황량 한 폐허에서 지식의 빈곤함과 보는 눈이 없음을 탄식하게 됐다.

 그곳에 가면 그 모든 위대함이 스스로 내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캄피돌리오 언덕에 올라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폐허일 뿐이었다.

 여기저기 움직이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분주했지만 세상은 고요했고 느릿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콜로세움 또한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본 콜로세움과 가까이 다가 간 콜로세움은 서로 다른 바가 없어서 멋과 기술의 대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늘 사진으로 보던 것이 눈앞에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감흥 정도가 있었다.

 당시 생활환경과 정치, 문화, 기술력 등을 아우르는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는 이에게 보이는 로마와 위대함이 제 발로 다가와 압도되길 바라는 나의 로마는 꽤나 큰 차이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그러한 괴리를 알 수 없었다. 

 로마를 떠나고 한참 뒤에야 조금의 지식을 얻고 다시 그 장소에 가고 싶어졌다.

 콜로세움에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개선문이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로마 여기저기에 역사의 산물이 서 있다.

 왠지 힘이 쑥 빠졌다.


 오늘이야 말로 된장찌개 한 그릇 먹고 힘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식당을 찾아갔다.

 핀란드를 떠난 후 첫 한식당이었다. 

 이번 여행의 본질은 ‘도보여행’에 있었으나 관광명소를 거점 삼으면서 본질이 변한 느낌이다.

 여지없이 두 공기를 먹고 비싼 소주도 한 병 마셨다. 

 왠지 속이 탔다. 

 전날 식비를 줄인다며 컵라면을 사 먹은 것이 결국 이렇게 과소비로 돌아온다.

 식당 와이파이를 연결하여 숙소 예약 정보를 확인하니 예약했던 에어비앤비가 취소됐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내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인도 청년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는 이탈리아 남자와 일본 남자, 정체 모를 남자가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 온 이탈리아 남자는 꽤나 수다스러웠으나 태반이 이탈리아어였고, 일본인은 수줍어하며 웃기만 했다.

 정체 모를 남자는 과묵하여 별 반응이 없었다.

 어쨌거나 모두 영어에 서툰 사람들이어서 더듬더듬 통성명을 하고 반갑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각자의 할 일을 했다.


 전날은 판테온을 중심으로 위쪽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오늘은 판테온 아래쪽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렀다.

 이틀간 로마를 걸은 결과를 도보 여행이라고 해야 할지 관광명소에 휩쓸린 가난한 여행자의 도보 이동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고 지쳐있기만 한 하다.

 아말피 해안을 걷는 것은 오직 내 체력과 의지의 싸움이었고 25k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성취감과 만족감이 있었다.

 오늘의 숙소를 떠나 다음 숙소를 향해 걸었고 걸어온 거리와 남은 거리만이 유일한 척도였다.

 로마에서는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고 있다.

 우선 계획한 대로 로마 남쪽에 있는 카타콤베로 가려한다.


 이른 아침 짐을 챙겨서 곧장 숙소를 나섰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 관광객은 없었고 로마 사람들의 일상이 있었다. 

 출근길 위의 차들과 청소부, 학생들의 발걸음을 보며 걷는 길이 반가웠다.

 이곳엔 욕심을 부릴 관광명소가 없다.

 돈의 흐름을 따라 밀집한 상권에선 복잡함과 활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주택가의 여유로움과 낯선 도시가 여행자에게 주는 미묘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목적지를 향해 걷는 행위만 남아 평온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지난 이틀간은 내면에 끝없이 솟아나는 욕심과의 싸움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카타콤베에 도착해서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다녀오고, 입구에 마련된 쉼터에 앉았을 때 로마를 벗어나 3차 도보 여행 장소로 이동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로마에 있는 동안은 시내 중심부에 몰려있는 각종 명소의 유혹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오늘 역시 숙소에서 카타콤베까지 7km 정도를 걸었을 뿐이다.

 OSTIENSE 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 탓에 인상을 쓰면서도 쉬지 않고 3km를 걸었고 기차역에서 표를 끊고 나니 그제야 배가 고팠다.

 샌드위치 두 개와 콜라 하나를 사서 미리 플랫폼으로 갔다.

 기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탓에 플랫폼은 텅 비어있었다.

 짐을 내려두고 철로를 따라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동안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결국 전제가 잘못됐다. 

 로마처럼 특정 관광 도시는 '내가 생각하는' 도보 여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런 도시에 진입하는 과정이 도보여행이고 도시에 진입하면 숙소를 잡고 이 도시를 여유 있게 둘러봐야 한다. 

 이런 깨우침은 다음 여정에 도움이 됐다.

 로마에 대한 환상 속에 착각을 했다. 

 우리가 고대 로마로 알고 있는 곳은 현재 로마의 1/10도 안된다. 

 깊은 사유를 동반한 연구가 아니라 보는 것에 족하다면 가방을 벗은 채로 하루 혹은 이틀이면 모든 것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앉아서 그간 느낀 것을 정리하며 스스로도 두 번째 도보여행 계획은 실패였음을 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샌드위치를 먹다가 핸드폰을 켜서 도시에서 도보 여행할 생각을 하는 것은 바보라고 영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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