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이 남긴 여운
회사에 친한 사람이 있나요?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3초는 망설여질 것 같다. 이 답을 하기 위해 먼저 '친하다'는 의미와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친하다'를 검색창에 입력해보니 '가까이 사귀어 정이 두텁다.' 로 정의하고 있다. 가까이 사귀어 정이 두텁다는 건 또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말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명징한 기준을 정했는데 바로, '단 둘이 밥을 세 번 이상 먹은 사이라면 친한 사이로 본다.'이다. 여기서 '세 번'이라는 횟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직장에서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질 때 으레 나오는 인사말이 '언제 밥 한 번 먹자.'인데 반해 실제로 만나서 밥을 먹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다가 한 번 만나서 밥을 먹었을 때 각자의 식사를 각각 계산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식사까지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한 번 얻어먹었으니 보답으로 한 번 사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문제는 세 번째 만남이다. 이 만남이 성사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서 친한 사이로 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만일 둘 다 뜸을 들인다면 그 둘의 관계는 흔한 직장 동료로 남게 되고 둘 중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둘은 동료에서 동무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쓰다 보니 소개팅 후 애프터, 삼프터의 진행 단계 같기도 하다.)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를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다 보았다. 정조 이산과 의빈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라 주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곁가지에 눈이 가고 마음이 쏠렸다. 바로 드라마 속 '궁녀즈' 들이었다. 성덕임과 그녀의 동무 복연, 경희, 영희는 어린아이였던 생각시 시절부터 궁에 들어와 궁녀로 함께 자라면서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자,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며 눈빛만 봐도 다 아는 가족이 된다. 승은을 입어 하루아침에 궁녀에서 빈으로 신분이 바뀐 덕임을 시기나 질투 없이 온전히 축하해주고, 영희가 별감과 사랑에 빠져 곤욕을 치를 때에도 궁녀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느냐며 비난하지 않는다. 경희는 잘 나가는 중인 집안의 딸로 똑부러지는 성격이지만 덜렁대고 실수투성이인 복연을 가장 잘 챙겨준다. '궁녀즈'를 지켜보며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회사에 동무가 있다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이없는 실수로 상사에게 크게 꾸지람 들었을 때 커피 한잔으로 위로받고, 좋은 일에 같아 기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음으로 외롭지 않다.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험난한 길에 나란히 함께 걷는 이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법이다.
대학으로 처음 전입 왔을 때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던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업무적으로 통화 시에 "저 OO 인데예~." 하면서 시작하는, 제주 느낌 물씬 나는 인사말이었다. "안녕하세요, OO부서에서 ㅁㅁ 업무를 맡고 있는 ***입니다." 그들의 정겨운 인사와 달리 나의 인사는 나를 설명하기 위한 말들로 길고 사무적이었다. 제주도라는 지역적 공통점을 기반으로 한 방언과 나도 상대를 알고 상대도 나를 알 아야 할 수 있는 친근한 어투는 나를 더욱 이방인으로 단정 짓는 것 같았다.(그때는 나만 빼고 서로 다 아는 사이처럼 느껴졌다.) 또 하나는 점심시간에 약속이 있어서 점심을 따로 먹으러 나가는 동료의 뒷모습이었다. 대학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체에 아는 이가 없으니 점심 약속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언제나 부서에서 그날그날에 따라 약속이 없는 동료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그러다 어쩌다 동료들이 한꺼번에 문상이라도 가는 날에는 혼자서 밥을 먹기도 했다.(일면식도 없는 동료의 상갓집에는 조문을 가는 것도 어색해서 조의금만 보내고 따라나서지 않았다.) 물론 만 6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수화기를 들고 "저 달콤달달인데요!" 하면 어려운 일도 조금 쉽게 풀리고 "오늘 점심은 따로 먹을게요" 하고 나가서는 동무 같은 동료들과의 점심시간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나의 회사 생활은 그때보다 지금 훨씬 더 풍요롭고 빈틈없이 즐겁다고 할 수 있다.
사람 때문에 힘든 날도 분명히 있다. 그래도 버텨지는 건 그들이 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기에 심리적 거리두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는 friend(친구)와 classmate(학교 동료)를 구별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그냥 '친구'로 통칭하며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라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학교나 회사나 같다. 반에서 마음 맞는 한두 명의 친구 덕분에 학교 가는 게 즐거웠던 것처럼 회사에서도 마음을 나누는 몇 명이면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은 일로 만난 사이일 뿐이다. 그들 때문에 일희일비하며 소중한 나의 에너지를 허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지만 야속하게도 마음의 영역은 늘 맘대로 되지 않는다. 강철을 만들기 위해 수천, 수만 번의 담금질을 하듯이 마음 단련은 필수이다. 다쳤다, 아물었다, 다쳤다, 아물었다 해야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을 넘어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우주의 기운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저절로 되지도 않는다. 누구나에게 동료로 남는 것은 쉬우나 누군가의 동무가 되는 것은 어렵다. 대가 없이,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주고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진실한 나를 내보여야 상대도 마음을 내어준다. 시 한 구절이 마음을 울린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광휘의 속상임>, 문학과지성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