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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May 13. 2022

남편 몰래 가방을 샀다

명품 가방은 아니에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기 위해 남편과 아이보다 먼저 현관문을 나섰는데 문 앞에 밤새 달려온 반가운 손님이 도착했다. 며칠 전 아이 운동화를 주문하며 봄, 여름 편하게 들고 다닐 가방 하나를 슬쩍 끼워 주문했었다. 보통 같으면 택배 상자를 그냥 현관 앞에 두었다가 퇴근할 때 집으로 가지고 갔을 테지만 일단은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상자를 뜯고 새 가방을 꺼내 매고 갈 요량으로 차 뒷좌석에 실었다.


퇴근하며 아이를 유치원에서 하원 시켜 카시트에 앉혔는데

- 엄마, 이거 뭐야?

아차차. 운전하며 가던 20분 사이 가방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나머지 새 가방이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하고 박스에 담겨 차에 방치 중이었다.

- 응, 엄마 가방이야. 새로 하나 샀어.

- 레고 아니야? 흔들어볼까?

장난감이었길 내심 바라는 아이의 실망 가득한 목소리를 짐짓 모르는 체하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주차장.

- 엄마, 가방 안 가지고 내려?

- 응, 내일 출근하면서 가지고 가려고. 그냥 둬도 돼.

아이 손을 잡고 걷는 길은 늘 즐겁지만 퇴근길은 유난히 발검음이 경쾌해진다. 날이 흐리고 습해서 아이의 방앗간인 놀이터는 들르지 못하고 집으로 왔는데 남편이 아이의 놀고 싶은 마음을 읽었는지 이내 동네 한 바퀴 산책에 나섰다. 생각지도 않은 자유시간에 '야호!'하고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같이 못 가서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남편과 아이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돌아선 순간

- 아빠, 엄마 차에 가방 있어. 엄마 가방 샀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아이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아, 세상에 비밀은 없지. 남편에게 가방 산 이야기를 아직 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선수를 쳐버렸다. 남편이 산책에서 돌아온 후에도 '가방'이 대화에 끼어든 적 없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잠들기 전 '이야기놀이' 시간에 아이에게 말했다.

- 엄마 사방 산 거 아빠한테 말했어? 비밀 지켜줘야지.

- 아빠한테 가방 샀다고 엄마 혼났어?

- 아니. 아빠가 엄마 하는 일에 화내는 거 봤어? 네 운동화도 사고 엄마 가방도 샀는데 아빠 것만 아무것도 안 사 가지고 미안해서 그렇지.

- 그러니까 왜 아빠 거를 안 샀어~~ 다음엔 아빠도 꼭 사 줘.

내 가방도 처음부터 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전에부터 눈여겨보던 가방이 마침 할인에 쿠폰까지 생긴 바람에 말 그대로 충동구매를 하고 말았다. 계획적 소비가 아니다 보니 남편 몫은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다. 원래도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미안함 마음이 은연중에 행동으로 나온 것 같다. 아침에 가방을 들고 나서지 말았을 걸, 그렇다면 저녁에 자연스럽게 가방 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별 것 아닌 일이 별 것이 된 기분이었다.


사실 무슨 대단한 가방을 산 것도 아니다. 명품은 더욱 아니다. 컨버스 재질의 평범한 손가방이고 지불한 금액도 49,110원으로 5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보통은 무얼 산 뒤 '여보 나 뭐 좀 샀어.' 하고 말을 하거나 도착한 택배를 개봉하며 자연스럽게 새로 산 물건 이야기를 하기 마련인데 괜히 택배 상자를 들고 출근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아이가 먼저 이야기하는 바람에 혼자 속앓이를 하게 된 셈이다.


아이가 잠든 후, 얇은 점퍼를 걸치고는 차에 가서 가방이 든 상자를 가져와 뜯었다.

- 짜잔~ 예쁘지? 요즘에 들고 다닐 거 없어서 하나 샀어.

- 응, 예쁘네. 잘했어!

남편은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았고 나도 괜스레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슬며시 덜었다. 남편은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사는 편이 아니다. 모든 돈을 내가 관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편이 자기를 위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 것이다. 옷도  주는 대로 불평 없이 입고 운동화나 다른 대부분의 것들도 있는  활용할  웬만해서는 먼저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번 일처럼 뒷전으로 밀릴 때가 종종 있다. 반면에 나는 사고 싶은 것에 거리낌이 없다. 분수에 맞게 사는데 익숙해서 12개월, 24개월 할부를 무기 삼아 물건을 사재끼지 않는 것은 다행 중에 다행이고 남편도 그런 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든 일단'오케이.' 게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내가 남편에게 말도 없이 가방을 산 것은 가격을 떠나서 잘한 일이 아니다. 신뢰의 기본은 작은 데서 출발하므로 사소한 내용이라도 부부 사이에서는 공유하고 숨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 큰 일 보다  별 것 아닌 일에서 오해가 비롯되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고, 타이밍을 놓치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어려워지게 된다. 오늘 하루의 시작은 반가운 택배 상자였는데 남편 몰래 가방을 산 여자로 끝이 났다. 명품백이라도 들어 있었어야 그럴듯한 해프닝이 되었을 텐데 컨버스 백처럼 소박하다. 소소한 나의 인생과 퍽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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