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평일 오전의 스타벅스란?

텅 빈자리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by 달콤달달


산부인과 정기 진료가 있어 회사에 휴가를 냈다. 전체진료의 20%만 사전 예약이 가능한 병원 시스템 때문에 사전 예약이 쉽지 않아 당일 전화 예약을 해야 하는데 진료 가능한 시간을 예측하기가 어려워 병원 진료가 있을 때에는 가급적 휴가를 내는 편이다. 예약이 가능한 8시 30분이 되자마자 병원에 전화를 걸지만 계속해서 통화 중이다. 그렇게 10번 남짓의 시도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고 오전에는 9시 30분에, 이때가 아니면 오후에나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9시 20분에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를 다 마쳤는데도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오후 진료였다면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이불속에서 뒹굴거리고 있었을 텐데 서두름의 결과로 공짜 하루가 주어진 셈이다.


병원 바로 맞은편 스타벅스에 가려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아이의 유치원 하원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선물 받은 쿠폰도 있으니. '반려견과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구나.' 출퇴근 시간의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는 평일 오전의 거리는 여유롭고 한가했다. 볼에 닿는 겨울바람은 그 기세가 한 풀 꺾여 차갑다기보다는 시원했고 이마에 닿는 햇볕은 봄꽃을 피울 수 있을 만큼 따사로웠다.(제주는 이미 유채꽃이 한창이다) 날씨가 좋네, 하며 고개를 들자 역시나 청명한 하늘이 거기에 있었다. 회사에 있었다면 컴퓨터와 마주 보고 앉아 일처리에 한창이었을 시간인데 새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스타벅스에 수많은 음료들이 있다한들 내가 마시는 음료는 늘 같다. 여름에는 아이스라테, 겨울에는 따뜻한 라테. 임신 중이라 디카페인으로 라테로 주문하고 달달한 초콜릿 케이크도 하나 주문해 매장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사실 스타벅스는 운전 중 카페인이 필요할 때 드라이브쓰루 방식으로 이용할 때가 많아 매장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바리스타만의 손 맛이 그대로 묻어나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제주에 많은 것도 스타벅스를 애용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생각해 보니 음료를 마시고 갈 목적으로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온 건 지난해 11월 어느 주말 이후 처음이었다. 동료 결혼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동갑내기 동료와 담소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음료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는데 거의 모든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주말에는 음료를 시키기 전 앉을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인데 평일 오전의 스타벅스는 유유하고 고요했다.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하고, 관객들로 가득했던, 공연이 끝난 이후의 무대처럼. 공간도 사람처럼 휴식이 필요하다는 듯이.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편안한 옷 차림을 한 맨 얼굴의 나는 주말의 스타벅스 보다는 평일 오전의 스타벅스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원하는 아무 자리에나 앉을 수 있었으므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가지고 나오는 책 한 권을 테이블 위에 올렸으나 눈은 창 밖에 머물렀다. 상사에게 결재를 득한 이후에나 오롯이 내게 주어지는 이 평화로운 시간들이 지금 길 위를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인 것인지, 저들도 나처럼 오랜만에 시간의 여백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 직장인이 누리는 평일 오전의 낭만 >


테이블 한쪽에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아이와 엄마가 나란히 앉아 아이는 문제집을 풀고 엄마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커피와 베이글을 사이에 두고 앉은 노년의 남녀도 보였다. 노부부가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기 위해 스타벅스를 찾은 것이 아닐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 보았다. 내 앞에는 아이 유치원 등원 후 합류한 남편이 앉아있었다. 커피에서는 익숙한 고소한 맛이 났고, 달고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는 아이를 생각나게 했다. 나가는 길에 하나 더 포장해 가야지, 생각의 회로가 아이에게 향하고 있을 때쯤 휴대전화 진동이 왔다. 회사였다.


휴가 중 회사에서 연락이 한 번도 안 오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꼭 담당자가 없을 때 없던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도 시설담당 주무관님이 개인 사정으로 엿새 휴가를 떠난 그 사이 제주에 불어닥친 갑작스러운 추위로 동파 피해가 발생하는 바람에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휴가 중인 담당자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천재지변은 통제가능한 변수가 아니니 논외로 하고, 나에게 걸려온 회사 전화는 당일 지출 요청 건이었는데 문제는 아직 지출품의 결재도 득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행정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다. 나랏돈을 쓰는 데는 100원이라도 (사업부서) 지출품의-(행정부서) 원인행위-(행정부서) 지출결의 3단계 결재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이후 자금이체 결재까지 총 4단계를 거쳐야 최종적으로 돈이 움직인다. 최소 3일 전에는 지출품의 접수가 완료되어야 지출까지 원활하게 진행되는데 사업 담당자(교수)가 이를 무시한 채 조교를 통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경험 많은 베테랑 조교였기에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 대학의 업무라는 게 대체로 이런 식_자기네들(교수)이 무슨 말만 하면 행정은 알아서 뒷받침해 줄 거라는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의 업무 방식_이라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기탱천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오붓하고 아늑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정당한 휴가의 권리를 행사하는 중이었으므로 나는 끝내 업무를 할 수 없겠으니 사비를 지출하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담당자와 나 사이에 끼어있는 조교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오전이므로 서두르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업무 전화를 마치고 나니 따뜻했던 커피도 온기를 잃었다. 식은 커피는 그 맛도 잃어 자리에서도 일어나기로 했다.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내게 허락된 평일 오전의 낭만이었나 보다.


업무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데 인색하다. 모두 자기가 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출퇴근 전후는 말할 것도 없고, 휴가 중인 혹은 휴직 중인, 심지어 퇴사한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구한다. 거리낌 없이, 미안한 마음 없이. 한 사람이 조직생활에 진저리를 느끼고 조직을 떠나게 되는 건 결국 이러한 무례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 때문일 터다. 오후 6시에 임박해서야 지출까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휴가도 끝이날 무렵, 같이 애태우며 일 처리를 했던 조교한테서 문자가 왔다. 자기 잘못은 아니었지만 자기 몫의 고마움은 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다시 사람으로 아물기도 한다. 스타벅스 말고 폴바셋의 평일 오전은 또 어떤 모습일지 완연한 봄이 오면 가 볼 생각이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으로 일에서 조금 멀어진 그때에, 회사에서 전화가 오지 않을 그때쯤에.

< 고마운 마음은 고마운 마음으로 받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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