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관음증이라는 병이 있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 보면 '타인의 사적인 활동을 몰래 엿보는 것으로 변태성욕장애 중 하나'라는 설명이 나온다. 내가 앓고 있는 증상도 이와 조금 비슷한데(물론 변태성욕장애는 아니다) 타인의 책장을 엿보는 것으로 이를 즐기고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굳이 병명을 붙이자면 관서(書)증 정도 되려나? 다른 사람들의 옷장에 뭐가 들어있는지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데 책장에 어떤 책들이 꽂혀있는지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의 MBTI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지금 읽는 책이 무엇인지는 엄청 궁금하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이고 읽고 있는 책을 보면 성향을 알 수 있다. 나와 맞을지, 아닐지도.
나는 한글을 일찍 깨친 어린이였지만 우리 집에는 읽을 책이 없었다. 서재가 없었고, 서재는커녕 변변한 책장도 없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으레 백과사전이나 위인전 같은 전집들이 책장에 꽂혀있있다. 번호대로, 가지런히. 나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는 친구가 마냥 부럽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100% 부모님의 취향을 반영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그 책들은 어쩌면 공부 잘하고(백과사전)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위인전) 무언의 압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백과사전은 숙제나 발표수업을 위한 참고자료로 종종 책장 밖 구경을 하곤 했지만 위인전은 책장에 갇혀 지내는 날이 많았다. 친구는 위인들의 빛나는 업적 위로 먼지가 쌓이는 걸 지켜만 볼 뿐, 도통 위인전을 꺼내 읽지 않았지만 지금은 본인의 취향대로 책을 읽는, 꽤 괜찮은 어른으로 자랐다(훌륭까지는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는데 솔직히는 집에서 책을 읽는 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많이 하는 '책육아'를 몸소 실천하고자 항상 책과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내게 책을 많이 사 주면서 책 읽기를 권장하는 분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녁때가 되면 하나뿐인 티브이 앞에서 리모컨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치열한 눈치싸움을 불사하는 분들이셨다. 엄마는 연속극, 아빠는 뉴스를 보기 위해서. 서열이 가장 낮은 나는 당연히 리모컨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둘 중 누가 이기는지 지켜본 후 엄마가 이기면 드라마를 같이 보고 아빠가 이기면 책 속으로 들어가기를 택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과자를 까먹고, 잠을 자지 않는 나머지 쉬는 시간에 책을 꺼내 들었다. 10분이면 최소 다섯 페이지는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지 않아서 좋았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책은 영화나 다른 유희거리와 달리 돈이 들지 않았다. 학교는 매일 가는 곳이고, 학교에 가면 도서관이 있고, 도서관에는 책이 많았다. 지금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할 때 바코드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책의 뒷면에 도서 카드가 있어서 빌릴 때 그 카드에 날짜, 학년, 반, 이름을 적어 제출하면 대여가 가능했다. 그 도서 카드 제일 윗 칸에 내 이름이 적히는 재미가 또 쏠쏠했다.(일본 영화 '러브레터'에서도 남학생이 도서 카드 뒷면에 여학생 그림을 그려서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첫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책 읽는 게 마냥 좋았다기보다는 생활환경의 영향으로 '어쩔 수 없이' 책과 친밀해진 '생활밀착형' 애서가로 자랐다.
나는 애서가이지 다독가는 아니다. 하루에 꼭 책 한 권을 읽는다거나, 전 분야의 책들을 섭렵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편식을 하듯 편독을 한다. 에세이와 소설을 가장 많이 읽는데 에세이는 가정식 백반, 소설은 특별식 같은 느낌이다. 가정식 백반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소화하는데 무리가 없는 것처럼 에세이도 그렇다.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있고 읽는데 부담이 없다. 특별식은 혀에 닿는 맛이 자극적인데 맛있고, 맛에 대한 여운이 길다. 소설 역시 휘몰아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읽는 재미가 있으며 다 읽은 뒤 감정이 길게 남는다. 에세이와 소설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다. 그다음으로 즐겨 읽는 장르는 인문학인데 보약 먹는 마음으로 읽는다. 뇌가 건강해지고 지적 영역에 근육이 붙는 기분이랄까.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도 SF장르의 소설은 잘 읽지 않았는데 천선란 작가의 <나인>이나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지구 끝의 온실>, <방금 떠나온 세계>는 빠져들어서 읽었다. 가장 손이 가지 않는 분야는 자기 계발서이다.
자기 계발서는 주로 성공과 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렇게 하니까 성공했고 성공했더니 돈이 따르더라 하는 건데 저자들이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성공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단지 실천하는 방법을 까먹었거나,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뿐. 요즘 둘째를 키우면서 잊고 지냈던 삶의 진리를 다시 배워가는 중인데 아기들은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성장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머리를 가누고,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고, 앉는 일련의 과정들은 아이가 혼자서 깨우치는 것이지 부모가 가르쳐서 하는 게 아니다. 아기는 몇 주전부터 소파를 잡고 일어서더니 이제는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앉는 방법도 터득했다. 물론 서툴러서 일어나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엉덩이를 뒤로 빼다가 쿵하고 엉덩방아를 찢거나 발라당 뒤로 나자빠지기도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어김없이 일어서고 다시 앉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삶의 이치는 책에만 있지 않다.
지난여름 집안 구조를 변경했다. 매일 집에만 있으니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이럴 땐 가구를 하나씩 옮기는 게 도움이 된다.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에 티브이를 없애면서 그 자리에 두었던 책장을 반대편 벽으로, 그러니까 소파를 앞쪽으로 당기면 생기는 공간으로 옮기면 좋을 것 같았다. 티브이를 다시 거실에 두면 어떠냐는 남편과 첫째의 의견이 있던 참이었다. 책장은 그곳에 자리 잡은 이후로 한 번도 이동한 적이 없었다. 5단 책장에서 위 두 단은 나의 책, 아래 두 단은 아이 책, 마지막 한 단은 놀이 교구 같은 걸 담아두었는데 남편은 책장을 옮기는 것만 담당했다. 책장에 관한 한 전적으로 나의 영역이라서 책을 빼는 것도(남편이 아무렇게나 책을 빼면 찾기 어려우므로), 빼낸 책을 다시 꽂는 것도 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책장 한 칸을 비우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예상보다 고생길이었다.
제주에 올 때 가지고 왔던 책들은 책장 두 칸이면 충분했는데 늘어난 책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이 책은 과학, 수학, 전래 동화처럼 영역이 분명해서 정리가 쉬운 반면 나의 책들은 저자별로 할지, 분야별로 할지, 색깔별로 할지 망설여졌다. 고민 끝에 출판사 별로 정리를 했는데 출판사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서 흥미로웠다. 책장 정리를 하면서 많이 버렸고, 여름이 지나간 뒤로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책이 더 늘어, 주차장에 이중주차되어 있는 차들처럼 이중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아기를 데리고 도서관에 가는 게 번거로워서 읽고 싶은 책들을 사들인 탓이다. 서평단을 통해 증정으로 받았던 책들과 두 번은 읽지 않을 책들을 추려야겠다. 인스타그램 이벤트로 책 나눔을 많이 하던데 인플루언서가 아니라서 신청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고, 책 포장이랑 택배를 보내는 것도 일이라서 아파트 도서관이나 주변 보육원에 기부하는 걸 고려하고 있다. 헌책방에 가서 다른 책과 교환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현재는 소파를 창가로 보내고, 티브이를 둘까 고민했던, 원래 책장이 있던 자리에 피아노를 두었다. 티브이는 거실에 두지 않기로 최종 합의했다. 놀이 공간과 겸용이긴 하지만 거실 서재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거실 서재를 만든 건 내가 가장 잘한 일이고,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 때문에 티브이가 서재를 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책장 정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 이혼 시키기>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책을 한 권 사 왔다. 책의 서문을 읽다가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책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앤 패디먼은 서재를 합치면 진정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했단다. 반면 내가 읽은 <서재 이혼 시키기>는 결혼 25년 만에 부부 각자의 서재를 갖기로 한 작가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서로 결혼시킬 또 이혼시킬 서재가 없다는 걸. 결혼 이후 남편이 제 돈으로 책 한 권 사는 걸 본 적이 없다. 집에 있는 책들을 읽지도 않는다. 남편이 이전 회사를 퇴직할 때 동료가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선물해 주었다며 들고 온 적이 있는데 역시나 읽는 걸 보지 못했다. 나는 원래부터 책 읽는 남자에게 큰 매력을 느껴왔는데 이 남자의 무엇에 끌려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다만 같이 있으면 편하고 웃는 모습이 닮았다는 게 사랑의 다른 말이라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