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우리 집에서 가장 쓰지 않는 물건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피아노이다. 사용 빈도가 낮다는 거지 쓸모 없다는 말은 아니다.(그게 그건가...) 내가 어릴 때 쓰던 피아노라고 하면 좀 더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피아노는 한참 전에 처분했고 지금 집에 있는 건 제주도 내려와서 중고로 구입했다. 피아노를 운반, 조율 해주신 선생님께서 얼마에 샀냐 물으셔서 50만 원 줬다고 했더니 잘 샀다고, 이건 '메이드 인 코리아'라며 요즘 만들어지는 건 중국OEM 방식인데 가격은 훨씬 비싸졌다고 하셨다. 관리 상태도 양호하다고 하셔서 괜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처음엔 새 피아노를 살까 고민도 했는데 한 대에 500만 원을 훌쩍 넘는 검색 결과를 보고 중고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피아노 광고를 티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맑은 소리, 고운 소리, 영창피아노 영창~'의 멜로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말이다. 피아노 수요가 크게 감소했다는 의미일 테다. 국영수로 대표되는 학습 위주의 교육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예전에는 남자는 태권도, 여자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요즘은 선택할 수 있는 예체능의 범위가 다양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홈쇼핑에서 간혹 판매중인 피아노를 보긴 하지만 어쿠스틱이 아닌 전자피아노이다. 거주형태가 아파트나 오피스텔처럼 공동주택이 일반화 되면서 방음이 어려운 어쿠스틱 피아노 대신 헤드셋을 쓰고 연주할 수 있는 전자 피아노 수요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에 살다보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쉽지 않다. 평일 낮이 가장 만만한데 보통은 근무 중이니까.(지금은 육아 중이고..) 주말엔 주말대로 이웃들의 휴식에 방해가 될까 우려되어 피아노를 칠 수가 없다. 손가락이 굳어 음반을 뭉개고 삑사리를 낼 게 뻔하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피아노와 친해지길 바라서 구입한 이유도 있다. 조성진이나 임윤찬처럼 세계를 감동시킬 피아니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악을 즐기고 감상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시기가 임신 중, 즉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이라는 점에서 극성 엄마의 기질이 다분했지만 다행히 발현하지는 않았다. 피아노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가 야속하긴 했어도 억지로 끌어다 앉힌다거나 피아노 학원에 밀어넣지 않았다. 피아노는 연주용이 아니더라도 바라만 보기에도 예뻐서 거실에 놓여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음률이 들려오는 것 같달까.(허세가 좀 심한 거 아니오?) 무엇보다 일단 둘째로 딸이 태어난 만큼 아들인 첫째보다는 피아노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두번째 김칫국을 마시는 중이다.
피아노 위에는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와 디퓨저 미니 선인장이 상주하고 가끔씩 아이가 유치원에서 만들어오는 각종 소품들이 머물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엔 둘째 기저귀와 로션같이 육아용품이 건반 뚜껑에 올려져있다. 당근으로 들였던 기저귀 갈이대는 아기가 엎치기 시작하면서 지인의 집으로 보내졌고, 이후 기저귀를 수납할 트롤리를 따로 구비하지 않다보니 갈 곳 없는 기저귀가 피아노에 자리를 잡았다. 보기에 심히 아름답지 않지만 아기가 기저귀를 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이건 업라이트가 아니라 그랜드 피아노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프랑스에서는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즐길 줄 아는 운동 하나, 말할 줄 아는 외국어 하나가 있어야 중산층이라고 한다. 사는 데 필수적이지 않지만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자가 아파트 몇 평 이상, 차는 중형 이상 같은 중산층 기준과 사뭇 다르게 들리지만 생각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악기, 운동, 외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기 위해서는 배움에 필요한 시간과 돈이 들기 마련이다.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 접근이 어렵다는 얘기다.
공교육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악기 하나, 운동 하나를 정해서 6학년 졸업 때까지 꾸준히 배울 수 있다면, 사교육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나 악기 하나를 연주할 있고, 즐길 수 있는 운동 한 종목이 생기는 셈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현재 학교에서 음악이나 체육 수업이 있긴 하지만 형식적이고 실기는 실기 평가를 위한 실기여서 평가를 위해 다시 학원을 다녀야 하는 실정이다. 영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어 교육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교육의 방향이 입시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다년 간 영어를 배움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구사하는데 역부족이다. 예체능과 영어는 입시가 아닌 실용으로 접근해야 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에서는 영어는 계속해서 문법, 독해 중심일 것이고 예체능은 외면받을 수 밖에 없을 테니.
삶은 입시에서 끝나지 않는다. 입시 이후의 삶이 진짜다. 고급 스펙에 대기업 다닌다고 해도 이렇다 할 취미 하나 없다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 클래식이 아니라 대중가요여도 좋고 골프가 아니라 뒷산 오르기라도 좋다. 유튜브 콘텐츠를 활용해 외국어를 배우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스페인어에 관심이 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풍류를 더해줄 '나만의 피아노'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 우리 집 피아노 위에 기저귀가 사라지는 날 뚜껑을 마음껏 열어젖히고 음반 위에서 손가락들이 노닐 날이 머지 않았다.(이제 9개월인데 벌써 9개월이기도 하다.) 손 끝에서 들려오는 멜로디가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리가.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열 손가락 중 단지 두 개의 손가락이면 충분한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그걸 감히 ‘연주’라 일컬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