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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Dec 23. 2023

제주 눈 안 온다며, 안 춥다며!

- 여보, 조퇴할 수 있어? 눈이 너무 많이 와. 태권도 학원에서 차량운행 못 한다고 연락 왔어.

- 어떡하지? 지금 못 갈 거 같은데.

- 그럼 나더러 가라고? 애기 데리고?

-......

- 끊어. 내가 알아서 할게.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남편이 조퇴를 하고 온다고 해도 평소 한 시간 거리인데 눈길에 운전을 한다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릴 터였다. 첫째를 데리러 가기. 갑작스럽게 임무가 주어졌다. 난이도 최상. 평소라면 최하 수준이었을 첫째의 유치원 하원이 아기 동반과 눈길이라는 상황과 맞물려 최고 수준의 힘든 일이 되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겨울 우주복을 꺼내 아기에게 입혔다. 지인이 물려준 옷으로 받을 때만해도 입힐 일이 있을까 싶었던 옷이었는데 눈 오는 날씨에 딱이었다. 나도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아기띠로 아기를 안았다. 눈이 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쌓였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릴까 싶기도 했지만 눈 내리는 추이를 지켜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눈이 더 많이 쌓일 게 분명했다. 폭설이었다. 제주 산간 지역 말고 시내에 눈 예보는 없었고 날씨 앱에도 흐림 표시만 떠 있었다. 이렇게 눈이 올 줄 알았더라면 첫째를 유치원에 보내지 말았을 걸.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들면 위험할 것 같았다. 대신 모자를 썼다. 아기에게도 우주복에 달린 모자를 씌웠다. 기모가 풍성한 우주복을 입혔지만 담요로 한 번 더 감쌌다. 아기에게는 첫 겨울. 차가운 눈송이가 볼에 닿는 감촉이 신기했는지 연신 고개를 들던 아기는 서늘한 공기의 매서움을 알아채고는 이내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눈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바람 때문에 눈발이 가로로 휘날리는 통에 걷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경사가 가파르지는 않지만 아파트 단지 내 언덕을 내려갈 때는 혹시라도 미끄러질까 봐 한 발 한 발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눈을 치우고 계시던 관리사무소 직원분께서 내 발 앞에 발을 받치며 같이 움직여주셨다.

- 웬만하면 댁에 계시지 않고...

- 제가 지금 유치원에 첫째를 데리러 가야 해서요.

- 네...

웬만하지 않은 상황에 직원 분이 말끝을 흐렸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도 폭설이 내렸다. 공부를 하고 있던 남편이 부랴부랴 아이를 하원시키기 위해 유치원에 갔고 다음 날은 등원하지 못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지만 집에 갇힌 신세였다. 남편과 연애할 때만 해도 제주도는 정말 딴 세상 같았다. 겨울의 제주는 서울의 기온과 10도 이상 차이가 나는 포근한 날씨에 눈도 거의 오지 않았다. 어쩌다 눈이 왔다면서 남편이 보내주는 사진을 보면 땅바닥에 싸라기눈이 흩뿌려진 정도였다. 2016년 1월 제주에 폭설이 내려 공항이 마비된 적이 있다. 2월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나는 준비 사항 점검 차 제주에 왔다가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비행기가 결항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항이 폐쇄된 초유의 사태였다.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아 제설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어 큰 혼란을 빚었다. 그도 그럴 것이 32년 만의 폭설이었다. 이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결혼 이후 제주에 살면서 한 두 해 빼고는 겨울마다 폭설을 경험하고 있다. 여름 태풍에 이어 겨울 폭설까지 제주살이에 걱정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제주도 안 춥다며, 눈 안 온다며! 결혼 후에 알게 되는 남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속았네, 속았어! 하는데 제주 날씨 마저 나를 속이다니.


가까스로 학교에 도착해서야 겨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을 머금은 사철나무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이며 너른 운동장에서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는 아이들, 빨개진 양볼에 가득 찬 미소,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웃음소리까지. 눈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겨울 선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나에게는 재난 상황에 가까웠지만. 나와 동생을 본 아이는 눈이 동그레 졌다. 엄마가 갑자기 데리러 온 것도 놀랄 일인데 모자며 옷이며 하얀눈으로 뒤덮였으니 무슨 일인가 싶었겠지. 신발을 신고 있는 아이에게 먼저 하원하던 친구가 소리쳤다. “우리 운동장에서 놀고 가자!” 누나와 엄마가 데리러 온 같은 반 친구였다. 아이는 영화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 눈빛을 장착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10분만 놀다가기로 하고 처음 보는 친구 엄마와 눈을 피해 서 있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아기띠에 매달려 갑갑했는지 아기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 제가 우리 아이들과 같이 놀리다가 데려다줄 테니 아기랑 먼저 들어가세요. 이제 막 신나게 놀고 있는데.


너무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사양의 뜻을 내비쳤다. 눈 올 때는 친구들이 많을수록 재미있는 거라며 괜찮으니 걱정 말고 조심히 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를 아이 친구 어머니께 맡기고 나는 다시 남극 탐사를 떠나는 대원으로 빙의해 결연한 자세와 각오로 집까지 걸어왔다. 공동현관에 들어서기 전 대충 눈을 털었는데도 집에 와서 보니신발장에 비친 모습이 눈사람이 따로 없었다. 잠시 뒤 사진 한 장이 메신저로 들어왔다. 분식집에서 어묵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 사진과 너무 추워서 잠시 몸을 녹이고 더 놀려서 보내겠다는 문자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잠시 뒤 몇 장의 사진이 더 도착했다. 눈밭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이었다. 같이 놀아주고 계신 것도 고마운데 사진까지 챙겨 보내주시다니. 산타클로스가 따로 있나? 선물 주시면 다 산타지.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에 선물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녹여주고 아이의 친구 어머니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쿠폰을 보내드렸다. 추울 땐 아이스크림이지!

< 사람 눈사람;; / 어묵들고, 자연스러웠어!  >


어릴 땐 나도 눈을 좋아했던가? 어른이 된 이후로는 눈을 겨울의 불청객으로만 여겼다. 나에게 춥고, 미끄럽고 위험한 존재가 아이들에게는 즐거움과 재미, 낭만 그 자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눈은 과거나 현재나 겨울이면 한결같이 찾아오는데 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건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펑펑 내리는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는 어른들. 마당 한가득 눈오리를 만드는 어른들. 또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나누는 어른들. 아이의 친구 어머니 덕분에 올 겨울만큼은 식어버린 동심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것 같다. 이틀의 폭설로 하얗게 쌓였던 눈은 우리에게 추억 한 장면을 만들어주고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조용히 퇴장하는 중이다. 또 눈이 내리면 아이와 아이 친구를 데리고 눈사람을 만들어야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녹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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